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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0760000 함양 교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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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Gyosujeong Pavilion, Ham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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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咸陽 敎授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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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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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교수정은 고려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이 1398년에 건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조승숙의 본관은 함안이며, 1381년(우왕 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갔다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을 위하여 정자를 지었다. 그 후 성종이 이 사실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수양명월율리청풍’이라는 글귀를 뽑아 자연암반 위에 새기고 거북거리를 조각하여 비를 세웠다. 비는 정자의 담 밖에 있으며 높이 320cm, 폭 90cm, 두께 39cm이다. 비의 대면에는 ‘입덕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정자 밑 동쪽에는 조씨 5효자의 정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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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정은 고려 말기 문신인 덕곡 조승숙(德谷 趙承肅)이 태조 7년(1398)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현재의 건물은 1872년경에 고쳐 지은 것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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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숙은 고려 우왕 7년(138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간 중국에도 이름을 널리 알렸으나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두문동 72현(賢)의 명으로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도의로 친교를 맺고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성종(1469~1494)은 조승숙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 이라는 여덟 자를 자연 암반에 새기고 거북머리를 조각하여 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320cm, 폭 90cm, 두께 39cm이다.
====초고====
 
398년(태조 7) 두문동 72현 중의 사람인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조선이 개국하자 절의를 지키려는 고려 신하 72명이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거나 낙향했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조승숙의 본관은 함안이고, 함양 출신으로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했다. 1391년(공양왕 3) 부여의 감무(監務)로 있다가 이듬해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이후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와 교유하며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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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정은 지곡천의 왼쪽에 있는 작은 독립 구릉의 정상부에서 남동쪽을 향해 있다. 온돌방 앞에는 고사리와 국화라는 뜻의 ‘미국(薇菊)’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조승숙의 충직함과 굳은 절개를 상징한다. 상부 가구는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과 기둥을 건너서 위에 얹은 나무)가 다섯 개이고  홑처마에 팔작지붕(지붕 위에 까치 박공(‘ㅅ’자 모양의 널빤지)이 달린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 형식이다.  
  
1870년(고종 7) 후손들이 옛 터에 교수정을 중건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 8자를 새겼다. 이는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이 성종의 명을 받고 지은 제문에 있는 글로 조승숙을 수양산으로 숨은 백이·숙제와 율리(栗里)에 은거한 도연명에 비긴 것이다. 교수정에 걸어놓은 ‘薇菊(미국)’이라는 글씨, 즉 고사리와 국화도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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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 수양은 백이, 숙제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숨어든 산이고, 율리는 도연명이 은거했던 마을 이름이다. 성종이 조승숙을 수양산의 밝은 달(수양명월)과 율리의 맑은 바람(율리청풍)에 비유한 것이다.
  
교수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전면과 우측면 1칸에는 마루를 깔고 나머지 칸에는 방을 두었다. 정자 네 면에는 까치다리 모양의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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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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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sujeong Pavilion, Hamyang'''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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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vilion was first established in 1398 by the civil official Jo Seung-suk (1357-1417). The current building dates to 1872.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398년에 지은 정자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는 72명의 신하가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에 은거하거나 낙향했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조승숙은 함양 출신으로 1377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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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Seung-suk was born in Hamyang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77. When the Goryeo dynasty (918-1392) fell a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as founded, he left his official post and lived in retirement in his hometown, where he built this pavilion and spent his latter years teaching his students.
  
1870년에는 후손들이 교수정을 중건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 8자를 새겼다. 이는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이 성종의 명을 받고 지은 제문에 있는 글로 조승숙을 수양산으로 숨은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율리에 은거한 도연명(陶淵明, 365~427)에 비긴 것이다. 교수정에 걸어놓은 ‘미국(薇菊)’이라는 글씨, 즉 고사리와 국화도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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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vilion consists of a wide wooden veranda in the front and on the right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in the rear left. There are several wooden plaques hanging inside the pavilion. The one hanging above doors to the room means “fern and chrysanthemum (薇菊)” and is a reference to loyalty and devotion, which these plants symbolize.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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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ront of the side gate is a stele erected in the late 19th century by Jo’s descendants. The stele is carved with eight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e bright moon of Shouyang Mountain and the clear wind of Chestnut Village (首陽明月栗里淸風),” which is a line from an epitaph posthumously bestowed to Jo by King Seongjong (r. 1469-1494). Shouyang Mountain (in today’s Shanxi, China) is where Boyi and Shuqi from the classic Chinese story hid after the Shang dynasty (16th C. BCE-1046 CE) was conquered by the Zhou dynasty (1046 BCE-256 CE) and they refused to serve two kings. Chestnut Village refers to the name of the home village of the Chinese poet Tao Yuanming (365-427), where he lived in retirement after leaving his post.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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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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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조승숙(1357-1417)이 1398년에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72년경에 고쳐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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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숙은 함양 출신으로 1377년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였으며,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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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앞쪽과 오른쪽의 넓은 마루와 왼쪽 뒤편의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 내부에는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중 온돌방 앞에 걸린 현판의 ‘미국(薇菊)’은 “고사리와 국화”라는 뜻이며 이 식물들은 충직함과 절개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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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뒤쪽의 협문 앞에는 19세기 후반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수양산의 밝은 달과 율리의 맑은 바람”이라는 뜻의 8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조선 성종(재위 1469-1494)의 명으로 지어진 제문에 있는 구절이다. 수양산은 중국 상나라의 인물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숨어든 산이다. 율리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365-427)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고향마을 이름이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 윤호진,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의 생애와 후대의 평가」, 『연민학지』23, 2015. -> 생애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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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호진,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의 생애와 후대의 평가」, 『연민학지』23, 2015. https://web.yonsei.ac.kr/yonmin/article/23/23-04.pdf -> 생애 전반
https://web.yonsei.ac.kr/yonmin/article/23/23-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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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숙, 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c_1377_001239&curSetPos=5&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 생몰 및 문과 급제
 
 
* 조승숙, 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생몰 및 문과 급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c_1377_001239&curSetPos=5&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 윤호진, 위의 글 88쪽. -> 성종의 명에 의한 제문 작성
 
* 윤호진, 위의 글 88쪽. -> 성종의 명에 의한 제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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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문동칠십이인,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91%90%EB%AC%B8%EB%8F%99%EC%B9%A0%EC%8B%AD%EC%9D%B4%EC%9D%B8
* 두문동칠십이인,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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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교수정, 디지털함양문화대전 및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510#p3 -> 함양정 건립연도(1398년)
https://ko.wikipedia.org/wiki/%EB%91%90%EB%AC%B8%EB%8F%99%EC%B9%A0%EC%8B%AD%EC%9D%B4%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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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정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8720 -> 함양정 중건연도(1870년)
 
 
* 함양 교수정, 디지털함양문화대전 및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함양정 건립연도(1398년)
 
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510#p3
 
 
 
* 교수정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 함양정 중건연도(1870년)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8720
 
  
 
[[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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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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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누정]]
 
[[분류: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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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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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2020 국문집필]] [[분류: 2020 국문초안지원사업]]

2021년 2월 5일 (금) 16:34 기준 최신판

함양 교수정
Gyosujeong Pavilion, Hamyang
함양 교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 교수정
영문명칭 Gyosujeong Pavilion, Hamyang
한자 咸陽 敎授亭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지정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함양 교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교수정은 고려 말기 문신인 덕곡 조승숙(德谷 趙承肅)이 태조 7년(1398)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현재의 건물은 1872년경에 고쳐 지은 것이다.

조승숙은 고려 우왕 7년(138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간 중국에도 이름을 널리 알렸으나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두문동 72현(賢)의 한 명으로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도의로 친교를 맺고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성종(1469~1494)은 조승숙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 이라는 여덟 자를 자연 암반에 새기고 거북머리를 조각하여 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320cm, 폭 90cm, 두께 39cm이다.

교수정은 지곡천의 왼쪽에 있는 작은 독립 구릉의 정상부에서 남동쪽을 향해 있다. 온돌방 앞에는 고사리와 국화라는 뜻의 ‘미국(薇菊)’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조승숙의 충직함과 굳은 절개를 상징한다. 상부 가구는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과 기둥을 건너서 위에 얹은 나무)가 다섯 개이고 홑처마에 팔작지붕(지붕 위에 까치 박공(‘ㅅ’자 모양의 널빤지)이 달린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 형식이다.


  •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 수양은 백이, 숙제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숨어든 산이고, 율리는 도연명이 은거했던 마을 이름이다. 성종이 조승숙을 수양산의 밝은 달(수양명월)과 율리의 맑은 바람(율리청풍)에 비유한 것이다.

영문

Gyosujeong Pavilion, Hamyang

This pavilion was first established in 1398 by the civil official Jo Seung-suk (1357-1417). The current building dates to 1872.

Jo Seung-suk was born in Hamyang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77. When the Goryeo dynasty (918-1392) fell a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as founded, he left his official post and lived in retirement in his hometown, where he built this pavilion and spent his latter years teaching his students.

The pavilion consists of a wide wooden veranda in the front and on the right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in the rear left. There are several wooden plaques hanging inside the pavilion. The one hanging above doors to the room means “fern and chrysanthemum (薇菊)” and is a reference to loyalty and devotion, which these plants symbolize.

In front of the side gate is a stele erected in the late 19th century by Jo’s descendants. The stele is carved with eight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e bright moon of Shouyang Mountain and the clear wind of Chestnut Village (首陽明月栗里淸風),” which is a line from an epitaph posthumously bestowed to Jo by King Seongjong (r. 1469-1494). Shouyang Mountain (in today’s Shanxi, China) is where Boyi and Shuqi from the classic Chinese story hid after the Shang dynasty (16th C. BCE-1046 CE) was conquered by the Zhou dynasty (1046 BCE-256 CE) and they refused to serve two kings. Chestnut Village refers to the name of the home village of the Chinese poet Tao Yuanming (365-427), where he lived in retirement after leaving his post.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조승숙(1357-1417)이 1398년에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72년경에 고쳐 지은 것이다.

조승숙은 함양 출신으로 1377년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였으며,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다.

정자는 앞쪽과 오른쪽의 넓은 마루와 왼쪽 뒤편의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 내부에는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중 온돌방 앞에 걸린 현판의 ‘미국(薇菊)’은 “고사리와 국화”라는 뜻이며 이 식물들은 충직함과 절개를 상징한다.

정자 뒤쪽의 협문 앞에는 19세기 후반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수양산의 밝은 달과 율리의 맑은 바람”이라는 뜻의 8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조선 성종(재위 1469-1494)의 명으로 지어진 제문에 있는 구절이다. 수양산은 중국 상나라의 인물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숨어든 산이다. 율리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365-427)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고향마을 이름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