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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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3500000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3500000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대표명칭=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 |대표명칭=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 ||
− | |영문명칭= | + | |영문명칭=Wooden Seated Buddha of Seongjeonam Hermitage, Jinju |
|한자=晉州 聖殿庵 木造如來 坐像 | |한자=晉州 聖殿庵 木造如來 坐像 | ||
− | |주소= | + | |주소=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 802 |
|소장처= | |소장처= | ||
|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 |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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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 ===국문=== | ||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은 성전암의 본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부처이다. 여래좌상은 높이 60㎝ 폭 43㎝의 비교적 작은 목조여래좌상으로 아미타부처의 아홉 가지 손 모양[구품인]* 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은 성전암의 본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부처이다. 여래좌상은 높이 60㎝ 폭 43㎝의 비교적 작은 목조여래좌상으로 아미타부처의 아홉 가지 손 모양[구품인]* 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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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을 만들 때 배안에 넣었던 유물[복장유물]*의 조성기(造成記)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만든 것으로 확인된다. | 불상을 만들 때 배안에 넣었던 유물[복장유물]*의 조성기(造成記)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만든 것으로 확인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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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영문=== | ||
− | + | '''Wooden Seated Buddha of Seongjeonam Hermitage, Jinju''' | |
===영문 해설 내용=== | ===영문 해설 내용=== | ||
− | 이 불상은 아미타불을 나타낸 | + | 이 불상은 아미타불을 나타낸 것이다. 아미타불의 공덕을 기리고 그의 이름을 염(念)하는 모든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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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은 1644년에 만들어졌다. 높이 60cm, 폭 43 cm의 작은 불상이지만, 만든 연대가 정확하여 목조 불상 연구 자료로 가치가 있다. | ||
− | + | 이 불상은 두 차례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무사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성전암의 전각 대부분이 불타거나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만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또한 2010년에는 방화로 법당이 전소되었으나, 당시 성전암의 스님 한 분이 뛰어들어가 불상을 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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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참고자료'''== |
*두 번의 ‘화마’를 딛고 일어선 천년명찰 ‘성전암’, 불교신문, 2014.10.2.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381 -> 한국전쟁과 2010년 화재 관련 사건 개요(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각들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 이 불상만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하며, 2010년 방화로 인해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탔을 때 총무 스님이 당시 대웅전에 뛰어들어가 이 불상을 구했다.) / 인조와의 인연 소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외갓집 인근의 여항산 성전암에 머물며 100일 기도를 올렸다. 성전암에는 인조대왕지위(仁祖大王之位)라는 위패가 봉안됐고, 인조대왕각(仁祖大王閣)이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두 번의 ‘화마’를 딛고 일어선 천년명찰 ‘성전암’, 불교신문, 2014.10.2.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381 -> 한국전쟁과 2010년 화재 관련 사건 개요(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각들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 이 불상만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하며, 2010년 방화로 인해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탔을 때 총무 스님이 당시 대웅전에 뛰어들어가 이 불상을 구했다.) / 인조와의 인연 소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외갓집 인근의 여항산 성전암에 머물며 100일 기도를 올렸다. 성전암에는 인조대왕지위(仁祖大王之位)라는 위패가 봉안됐고, 인조대왕각(仁祖大王閣)이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2020년 11월 28일 (토) 16:21 판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Wooden Seated Buddha of Seongjeonam Hermitage, Jin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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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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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Wooden Seated Buddha of Seongjeonam Hermitage, Jinju |
한자 | 晉州 聖殿庵 木造如來 坐像 |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 802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
지정(등록)일 | 2000년 1월 31일 |
분류 | 유물/불교조각/목조/불상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좌(座) |
웹사이트 |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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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은 성전암의 본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부처이다. 여래좌상은 높이 60㎝ 폭 43㎝의 비교적 작은 목조여래좌상으로 아미타부처의 아홉 가지 손 모양[구품인]* 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불상을 만들 때 배안에 넣었던 유물[복장유물]*의 조성기(造成記)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만든 것으로 확인된다.
불상의 크기는 작지만 만든 연대가 정확하여 17세기 목조 불상의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
-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 아미타불이 대중의 높낮이에 맞춰 설법을 하기 위한 손의 모양으로 상・중・하의 세 단계에 각 단계별로 상생・중생・하생 의 세 가지를 더해 아홉가지 손모양이다.
- 복장 유물 : 불상 등을 조성할 때 조각상의 몸속에 넣었던 유물로 주로 조성기(造成記), 후령통, 경전 등이다.
영문
Wooden Seated Buddha of Seongjeonam Hermitage, Jinju
영문 해설 내용
이 불상은 아미타불을 나타낸 것이다. 아미타불의 공덕을 기리고 그의 이름을 염(念)하는 모든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은 1644년에 만들어졌다. 높이 60cm, 폭 43 cm의 작은 불상이지만, 만든 연대가 정확하여 목조 불상 연구 자료로 가치가 있다.
이 불상은 두 차례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무사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성전암의 전각 대부분이 불타거나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만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또한 2010년에는 방화로 법당이 전소되었으나, 당시 성전암의 스님 한 분이 뛰어들어가 불상을 구했다.
참고자료
- 두 번의 ‘화마’를 딛고 일어선 천년명찰 ‘성전암’, 불교신문, 2014.10.2.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381 -> 한국전쟁과 2010년 화재 관련 사건 개요(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각들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 이 불상만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하며, 2010년 방화로 인해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탔을 때 총무 스님이 당시 대웅전에 뛰어들어가 이 불상을 구했다.) / 인조와의 인연 소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외갓집 인근의 여항산 성전암에 머물며 100일 기도를 올렸다. 성전암에는 인조대왕지위(仁祖大王之位)라는 위패가 봉안됐고, 인조대왕각(仁祖大王閣)이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