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여완 선생 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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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여완(1309~1397) | + | 고려 말의 문신 성여완(成汝完, 1309~1397)과 부인 금성 나씨의 합장묘이다. |
− | + | 성여완은 충숙왕 5년(1336) 과거에 급제하여 첨서밀직과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승려 신돈(辛旽, ?~1371)이 처형당할 때 그의 무리로 몰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 |
− | + | 아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이성계의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으나, 성여완은 고려 왕실에 대한 절개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포천시 신북면)에 들어가 스스로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칭하면서 은거하였다. | |
− | + | 묘 주위에는 그의 아들들이 태종 1년(1401)에 건립한 묘비 2기가 있다. 이 외에도 상석 2기, 향로석 2기, 문인석 4기가 배치되어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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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자료'''== | ||
*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22일 을해: 창성 부원군 성여완의 졸기.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1022_001 | *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22일 을해: 창성 부원군 성여완의 졸기.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1022_001 | ||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 |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 |
2020년 6월 29일 (월) 17:26 판
성여완 선생 묘 Tomb of Seong Yeo-w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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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성여완 선생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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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Seong Yeo-wan |
한자 | 成汝完 先生 墓 |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24 |
지정(등록) 종목 | 포천시 향토유적 제21호 |
지정(등록)일 | 1986년 4월 9일 |
소유자 | 사유 |
해설문
국문
고려 말의 문신 성여완(成汝完, 1309~1397)과 부인 금성 나씨의 합장묘이다.
성여완은 충숙왕 5년(1336) 과거에 급제하여 첨서밀직과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승려 신돈(辛旽, ?~1371)이 처형당할 때 그의 무리로 몰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아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이성계의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으나, 성여완은 고려 왕실에 대한 절개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포천시 신북면)에 들어가 스스로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칭하면서 은거하였다.
묘 주위에는 그의 아들들이 태종 1년(1401)에 건립한 묘비 2기가 있다. 이 외에도 상석 2기, 향로석 2기, 문인석 4기가 배치되어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 자료
-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22일 을해: 창성 부원군 성여완의 졸기.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1022_001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
- 성여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447
- 성여완 선생 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000761
- 왕방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000097
- 〔우리고을 포천의 문화유적 34〕 성여완선생 묘(宬汝完先生 墓), 포천신문. http://m.ipcs21.com/view.php?idx=7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