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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德泉君,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후생(李厚生)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공을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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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처음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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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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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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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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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덕천군사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4500060000 ⇒ 사우 기본 내력과 이건에 대한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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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97_1_0017467&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 덕천군에 대한 이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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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 사우, 디지털공주문화대전. http://gong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gongju&dataType=98&callFunc=goSearch()%3B&keyword=%EB%8D%95%EC%B2%9C%EA%B5%B0 ⇒ 덕천군 태몽과 작명에 대한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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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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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9일 (화) 12:34 판


장군 덕천군사우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장군 덕천군사우
한자 將軍 德泉君祠宇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태산길 93-6
국가유산 종목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정(등록)일 2012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76.5㎡
웹사이트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덕천군(德泉君,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후생(李厚生)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공을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처음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1차 수정

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