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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403년(태종 3)에 행호조사(行乎祖師, 생몰 연대 미상)가 중건하였다. 이 절의 경내에는 모두 4기의 부도가 있는데, 2기는 행호조사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것이고, 다른 2기는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라 전한다. 높이는 1.4~1.5m 정도로 거의 일정하다. 이 중 하나인 8각형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8각 부도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시대의 것으로 비교적 안정감이 있고 단정한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지붕돌(屋蓋石) 위쪽에는 꼭대기 부분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국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403년(태종 3)에 행호조사(行乎祖師, 생몰 연대 미상)가 중건하였다. 이 절의 경내에는 모두 4기의 부도가 있는데, 2기는 행호조사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것이고, 다른 2기는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라 전한다. 높이는 1.4~1.5m 정도로 거의 일정하다. 이 중 하나인 8각형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8각 부도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시대의 것으로 비교적 안정감이 있고 단정한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지붕돌(屋蓋石) 위쪽에는 꼭대기 부분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호조사는 고려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닫고 천채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불교가 강하게 배척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세종의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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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호조사는 고려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닫고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불교가 강하게 배척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세종의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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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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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암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2기는 1403년에 안국암을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고, 다른 2기는 각각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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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의 승탑 중 가운데에 있는 팔각형의 행호조사 승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행호조사는 고려시대의 명재상인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으로, 태종(1400~1418 재위)과 세종(1418~1450 재위)의 신임을 얻었으며 지리산 부근의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전란과 억불정책으로 쇠락해진 사찰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세종의 형 효령대군(1396~1486)은 행호를 특히 공경하여 그를 ‘진불(眞佛)’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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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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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안국암 승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03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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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호대선사, 금강신문, 2011.12.02.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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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안국암 승탑, 디지털함양문화대전. 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469
  
 
[[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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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9일 (수) 17:04 판


함양 안국암 승탑
함양 안국암 승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 안국암 승탑
국가유산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지정(등록)일 1972년 2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양 안국암 승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안국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403년(태종 3)에 행호조사(行乎祖師, 생몰 연대 미상)가 중건하였다. 이 절의 경내에는 모두 4기의 부도가 있는데, 2기는 행호조사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것이고, 다른 2기는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라 전한다. 높이는 1.4~1.5m 정도로 거의 일정하다. 이 중 하나인 8각형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8각 부도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시대의 것으로 비교적 안정감이 있고 단정한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지붕돌(屋蓋石) 위쪽에는 꼭대기 부분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호조사는 고려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닫고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불교가 강하게 배척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세종의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안국암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2기는 1403년에 안국암을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고, 다른 2기는 각각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모셨다.

4기의 승탑 중 가운데에 있는 팔각형의 행호조사 승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행호조사는 고려시대의 명재상인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으로, 태종(1400~1418 재위)과 세종(1418~1450 재위)의 신임을 얻었으며 지리산 부근의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전란과 억불정책으로 쇠락해진 사찰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세종의 형 효령대군(1396~1486)은 행호를 특히 공경하여 그를 ‘진불(眞佛)’이라 불렀다고 한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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