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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과거 농경사회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나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유교통치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이 사직을 제도화하였고, 의종 때 정비가 이루어 졌다. 조선 초 태종은 전국의 부·목·군·현의 행정단위마다 사직단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사직제를 거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3백여 개가 넘는 읍치에 사직단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것은 각 읍치의 중요 제례시설이었다. 하지만 1908년 통감부의 칙령으로 亨祀에 관한 시설이 대부분 철폐됨에 따라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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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과거 농경사회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나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던 곳이다. 사직단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사직단을 건립하여 봄과 가을에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300여 개의 사직단이 존재하였으나,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부분이 철폐되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0년 4월 28일 (화) 16:27 판


고성 사직단
대표명칭 고성 사직단
한자 固成 社稷壇
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국가유산 종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296호
지정(등록)일 2019년 1월 3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제사유적/제사터
수량/면적 598
웹사이트 고성 사직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고성읍 교사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직단이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농경사회인 조선에서 신성하게 여겼던 공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고성현에는 고성의 사직단이 “현(縣)의 서쪽에 있다.”고 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에 발행된 『고성현읍지』와 『경상도읍지』 등도 “현의 서쪽 5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1893~1894년 고성부사 오횡묵(吳宖默)의 일기 『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에는 고성부사가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의 제물과 제관, 날씨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고성 사직단이 있는 교사리(校社里)의 지명은 향교가 있던 교동(校洞)과 사직단이 있던 사동(社洞)에서 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2017년 조사결과, 동서 약 5m, 남북 약 4.2m의 제단과 이를 둘러싸는 20여m의 담장, 남쪽의 출입구 등이 확인되었다.

  • <고성신문>에 의하면 2019년 당시 복원 계획 중인데, 현재 복원 중인지 확인 필요.

1차 수정

사직단은 과거 농경사회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나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던 곳이다. 사직단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각 행정단위마다 사직단을 건립하여 봄과 가을에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300여 개의 사직단이 존재하였으나,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부분이 철폐되었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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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s

참고자료

http://www.gosnews.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447&idx=20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