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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웅치 전적
대표명칭 임진왜란 웅치 전적
한자 壬辰倭亂 熊峙 戰蹟
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51 ,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산289 일원
지정번호 사적
지정일 2022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전적지 / 임란전적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1필지, 232,329㎡
웹사이트 임진왜란 웅치 전적,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1592년 음력 7월)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과 의병이 힘을 모아 호남을 지켜낸 웅치전투가 일어난 장소이다. 초기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하게 되는 국난 극복의 역사 현장으로 인정받아 2022년 12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웅치는 완주와 진안 경계 일원의 지명으로 전주와 호남 동부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웅치전투는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해 오는 왜군을 막아서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왜군은 고개를 넘어 전주 부근(現 전주시 산정동 일원)까지 진출하였으나 전투 과정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와 조선군의 반격으로 결국 후퇴하게 된다. 이는 전주를 점령하여 호남을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했다는 점에서 국난 극복의 전투로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웅치전투에 참여했던 관군과 의병은 이후 경기도와 경상도로 진출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호남지역은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등 임진왜란 극복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화유산 지정 구역은 문헌 기록* 및 지명유래 등을 통해 주요 전투가 벌어졌던 ‘웅치길-웅치고개-건지봉’으로 설정되었다.


  • 난중잡록, 징비록, 진안지, 사천김씨세보, 최학부 묘비문 등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음력 7월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 맞서 전라도 지역을 지켜낸 웅치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초기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하게 된 국난 극복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2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웅치는 완주와 진안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전주와 전라도 동부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1592년 음력 4월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전쟁이 장기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식량을 확보하고자 전라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왜군은 웅치를 통해 전주성을 점령하려 하였으며, 고개를 넘어 지금의 전주시 산정동 일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반격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왜군은 전투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결국 후퇴하였다. 웅치전투에서의 승리는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했다는 점에서 국난 극복의 전투로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웅치전투에 참여했던 관군과 의병은 이후 경기도와 경상도로 진출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전라도 지역은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등 임진왜란 극복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