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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tes of Joryeong Path, Mun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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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three gates along Joryeong Path in Mungyeong were built in the Joseon period (1392-1910). Joryeong Path, also known as Mungyeongsaejae Pass, was the steepest and most dangerous section of the major road that connected the southeast region of the country to the capital (today’s Seoul). Therefore, this path was considered an important military stronghold and a hub for transportation, trade,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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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it was suggested by some to hold off the enemy’s advance by utilizing the impregnability of Joryeong Path. However, the general Sin Rip (1546-1592) insisted on fighting the Japanese army on flat terrain and faced a great defeat in the Battle of Chungju. In 1593, having reevaluated the strategic significance of the path, the government discussed the idea of building gates along it. In 1594, a specific plan of construction was put forward by the chief state councilor Ryu Seong-ryong (1542-1607). The construction and protection of the gates was entrusted to the chief gatekeeper Sin Chung-won, who was born in Chungju and knew the local terrain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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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tes are referred to as Gate Nos. 1, 2, and 3 from south to north. Gate No. 2 was built in 1594, while the other two were completed only in 1708. Gate No. 3, located at the very top of Joryeong Path, was built as a part of Joryeongsanseong Fortress to protect the area from enemies advancing from the north. Each gate consists of an arched stone passageway, flanked by fortress walls on either side, with a wooden pavilion on top. The wooden pavilions of Gate Nos. 2 and 3, which had previously collapsed, were rebuilt in 1975 and 1977, respectively. Located nearby are various auxiliary structures, such as the northern and eastern secret entrances, a guard pavilion, and a well site.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조령 관문은 조선시대에 문경 조령에 설치한 3개의 문을 말한다. 조령 또는 새재는 “새 고개”라는 뜻으로, 낙동강 유역의 영남 지방과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 상 가장 험준한 고갯길이었으며, 군사, 교통, 물류, 문화 등의 요충지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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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 관문은 조선시대에 문경 조령에 설치한 3개의 문을 말한다. 조령 또는 문경새재는 낙동강 유역의 영남 지방과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 상 가장 험준한 고갯길이었으며, 군사, 교통, 물류, 문화 등의 요충지로 여겨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남쪽에서 진격하는 적을 막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신립 장군(1546-1592)은 평지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며 충주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1593년 조정에서는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관문을 설치할 것을 논의하였다. 1594년 영의정 류성룡(1542-1607)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조령의 지형을 소상히 알고 있는 충주 출신의 수문장 신충원에게 관문의 설치와 조령 방어를 맡기게 하였다. 이후 1594년부터 1708년까지 3개의 관문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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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남쪽에서 진격하는 적을 막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신립 장군(1546-1592)은 평지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며 충주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1593년 조정에서는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관문을 설치할 것을 논의하였다. 1594년 영의정 류성룡(1542-1607)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조령의 지형을 소상히 알고 있는 충주 출신의 수문장 신충원에게 관문의 설치와 조령 방어를 맡기게 하였다.  
  
세 문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제1, 2, 3관문으로 불린다. 이중 제2관문이 1594년 가장 먼저 세워졌고, 나머지 두 문은 1708년에 세워졌다. 특히 제3관문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조령산성의 문루로 조령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세 문 모두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목조 누각을 세웠고, 문 양옆으로 돌로 성벽을 쌓았다. 제2관문과 제3관문은 허물어졌던 것을 각각 1975년과 1977년에 다시 세웠다. 부속시설로는 북암문(北暗門), 동암문(東暗門), 포루(砲壘), 우물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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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제1, 2, 3관문으로 불린다. 이중 제2관문이 1594년에 세워졌고, 나머지 두 문은 1708년에 세워졌다. 특히 제3관문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조령산성의 문루로 조령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세 문 모두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목조 누각을 세웠고, 문 양옆으로 돌로 성벽을 쌓았다. 제2관문과 제3관문의 문루는 허물어졌던 것을 각각 1975년과 1977년에 다시 세웠다. 부속시설로는 북암문(北暗門), 동암문(東暗門), 포루(砲壘), 우물터 등이 있다.
  
  

2024년 6월 10일 (월) 13:34 기준 최신판

문경 조령 관문
Gates of Joryeong Path, Mungyeong
문경 조령 관문,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대표명칭 문경 조령 관문
영문명칭 Gates of Joryeong Path, Mungyeong
한자 聞慶 鳥嶺 關門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555외 45필
지정번호 사적
지정일 1966년 3월 22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50,833㎡
웹사이트 문경 조령 관문,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새재(鳥嶺)는 예로부터 낙동강 유역의 영남지방에서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 상 가장 험준한 고갯길로 군사, 교통, 물류, 문화 등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제3관문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조령산성의 문루(門樓)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1708년(숙종 34년)에 세웠으며 ‘영성(嶺城)’, ‘조령관(鳥嶺關)’ ‘영남제3관’ 등으로 불린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은 새재를 지키지 않고 충주 달천에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전하였다. 이에 1593년(선조 26년) 새재의 군사적 중요성이 제기되었고, 1594년 영의정 류성룡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주인으로 수문장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령에 머물면서 일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2관문이다. 새재에 있는 3개의 관문 중 가장 먼저 축성되었다. ‘중성(中城)’, ‘조곡관(鳥谷關)’, ‘조동문(鳥東門)’, ‘영남제1관’ 등으로 불린다. 또한 1708년(숙종 34년) 2관문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1관문을 세웠다. 1관문은 초곡성(草谷城), 주흘관(主屹關), ‘영남제1관’ 등으로 불린다.

1, 2, 3관문의 문루는 돌로 축조한 홍예문(虹霓門) 위에 있으며, 문루와 연결되는 평지성이 있다. 문루와 평지성 좌우의 능선을 따라 산성을 축조하였다. 부속시설로 북암문(北暗門), 동암문(東暗門), 포루(砲壘), 우물터 등이 있다.

영문

Gates of Joryeong Path, Mungyeong

These three gates along Joryeong Path in Mungyeong were built in the Joseon period (1392-1910). Joryeong Path, also known as Mungyeongsaejae Pass, was the steepest and most dangerous section of the major road that connected the southeast region of the country to the capital (today’s Seoul). Therefore, this path was considered an important military stronghold and a hub for transportation, trade, and cultur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it was suggested by some to hold off the enemy’s advance by utilizing the impregnability of Joryeong Path. However, the general Sin Rip (1546-1592) insisted on fighting the Japanese army on flat terrain and faced a great defeat in the Battle of Chungju. In 1593, having reevaluated the strategic significance of the path, the government discussed the idea of building gates along it. In 1594, a specific plan of construction was put forward by the chief state councilor Ryu Seong-ryong (1542-1607). The construction and protection of the gates was entrusted to the chief gatekeeper Sin Chung-won, who was born in Chungju and knew the local terrain well.

The gates are referred to as Gate Nos. 1, 2, and 3 from south to north. Gate No. 2 was built in 1594, while the other two were completed only in 1708. Gate No. 3, located at the very top of Joryeong Path, was built as a part of Joryeongsanseong Fortress to protect the area from enemies advancing from the north. Each gate consists of an arched stone passageway, flanked by fortress walls on either side, with a wooden pavilion on top. The wooden pavilions of Gate Nos. 2 and 3, which had previously collapsed, were rebuilt in 1975 and 1977, respectively. Located nearby are various auxiliary structures, such as the northern and eastern secret entrances, a guard pavilion, and a well site.

영문 해설 내용

조령 관문은 조선시대에 문경 조령에 설치한 3개의 문을 말한다. 조령 또는 문경새재는 낙동강 유역의 영남 지방과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 상 가장 험준한 고갯길이었으며, 군사, 교통, 물류, 문화 등의 요충지로 여겨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남쪽에서 진격하는 적을 막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신립 장군(1546-1592)은 평지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며 충주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1593년 조정에서는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관문을 설치할 것을 논의하였다. 1594년 영의정 류성룡(1542-1607)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조령의 지형을 소상히 알고 있는 충주 출신의 수문장 신충원에게 관문의 설치와 조령 방어를 맡기게 하였다.

세 문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제1, 2, 3관문으로 불린다. 이중 제2관문이 1594년에 세워졌고, 나머지 두 문은 1708년에 세워졌다. 특히 제3관문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조령산성의 문루로 조령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세 문 모두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목조 누각을 세웠고, 문 양옆으로 돌로 성벽을 쌓았다. 제2관문과 제3관문의 문루는 허물어졌던 것을 각각 1975년과 1977년에 다시 세웠다. 부속시설로는 북암문(北暗門), 동암문(東暗門), 포루(砲壘), 우물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