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여완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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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여완 선생 묘
Tomb of Seong Yeo-wan
디지털포천문화대전
대표명칭 성여완 선생 묘
영문명칭 Tomb of Seong Yeo-wan
한자 成汝完 先生 墓
주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24
지정(등록) 종목 포천시 향토유적 제21호
지정(등록)일 1986년 4월 9일
소유자 사유



해설문

국문

고려 말의 문신 성여완(成汝完, 1309~1397)과 부인 금성 나씨의 합장묘이다.

성여완은 충숙왕 5년(1336) 과거에 급제하여 첨서밀직과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승려 신돈(辛旽, ?~1371)이 처형당할 때 그의 무리로 몰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아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이성계의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으나, 성여완은 고려 왕실에 대한 절개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포천시 신북면)에 들어가 스스로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칭하면서 은거하였다.

묘 주위에는 그의 아들들이 태종 1년(1401)에 건립한 묘비 2기가 있다. 이 외에도 상석 2기, 향로석 2기, 문인석 4기가 배치되어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문

Tomb of Seong Yeo-wan

This is the tomb of Seong Yeo-wan (1309-1397),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and his wife, Lady Na.

S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36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cluding as chancellery scholar. When the monk Sin Don (?-1371) was executed in 1371, Seong was accused of being an associate of Sin Don and was exiled.

His son Seong Seok-rin (1338-1423) supported the revolution of the general Yi Seong-gye (1335-1408), who went on to fou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became a meritorious subject. However, he refused to serve any official post in the new dynasty to remain faithful to the Goryeo dynasty. In his later years, he lived in seclusion in a village in Pocheon (today’s Sinbuk-myeon).

In front of the tomb mound, there are two tombstones erected in 1401 by Seong Yeo-wan’s sons. There are also two stone tables, two stone incense tables, and four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se structures are valuable resources in the study of tombs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참고자료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