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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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이이(李珥, 1536~1584)는 조선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1501~1561), 어머니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며,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짓고, 10세 때에 강릉 경포대에 올라 「경포대부」를 지을 정도로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작고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다. 20세 때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오죽헌에 돌아와 유교적 수양론을 담은 「자경문」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예안의 도산으로 이황을 찾아가 강론하였고, 그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하는 등 13세 이후 여러 차례의 과거에서 장원하여 학문적 출중함을 드러냈다.

1564년(명종 19)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에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69년에는 임금에게 왕도정치의 실천 방안을 담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4년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지진 등의 재해가 잦자 당시 정치‧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만언봉사」를 올렸다. 1575년에는 제왕학의 지침서인 『성학집요』를 편찬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1577년(선조 10)에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1580년에는 기자의 해적을 정리한 『기자실기』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를 시행하여 빈민 구제에 힘쓰기도 했다.

1582년(선조 15)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을 쓰고, 『학교모범』을 지었으며, 1583년에는 「시무육조」를 올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선조 17) 음력 1월 16일 서울 대사동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24년(인조 2)에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자 조선을 개혁하고자 각종 사회제도 정비에 앞장선 탁월한 정치가였다. 평생 청빈을 잃지 않았고, 윤리성과 합리성까지 겸비한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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