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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는 [[광주_8장사]] 중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권율 장군을 도와 왜군에 맞서 싸웠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군호로 ‘금남(錦南)’이 내려졌다. 이후 그의 군호를 기려 광주의 중심 거리에는 [[금남로(錦南路)]]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 | 그는 [[광주_8장사|광주 8장사]] 중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권율 장군을 도와 왜군에 맞서 싸웠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군호로 ‘금남(錦南)’이 내려졌다. 이후 그의 군호를 기려 광주의 중심 거리에는 [[금남로|금남로(錦南路)]]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 − | + | [[정충신]]의 충절은 조선 후기 지역 사우(祠宇)에도 함께 기려졌다. 1644년 인조 연간에 광주 동명동 일대에는 정지 장군의 유허를 중심으로 [[동명동_경열사|경열사]]가 처음 창건되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정충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들이 함께 배향되었다. 이후 이 사우는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며, 현재 광주 북구 망월동에 자리한 [[경열사]]는 1981년 [[정지|정지 장군]]의 묘소 인근에 다시 세워진 사당으로, 오늘날에는 정지 장군만을 배향하고 있다. | |
| − | + | [[정충신]]은 출신 신분을 넘어선 충절과 무공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광주 지역사와 시민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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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4일 (수) 16:29 기준 최신판
천민 출신에서 장군까지 올라간 인물 금남로의 정충신
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 휘하에서 맹활약한 정충신(鄭忠信)은 광주 출신의 대표적 무장으로, 원래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무공과 충절로 조선 최초의 무관 출신 승지(承旨)가 된 인물이다.
그는 광주 8장사 중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권율 장군을 도와 왜군에 맞서 싸웠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군호로 ‘금남(錦南)’이 내려졌다. 이후 그의 군호를 기려 광주의 중심 거리에는 금남로(錦南路)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충신의 충절은 조선 후기 지역 사우(祠宇)에도 함께 기려졌다. 1644년 인조 연간에 광주 동명동 일대에는 정지 장군의 유허를 중심으로 경열사가 처음 창건되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정충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들이 함께 배향되었다. 이후 이 사우는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며, 현재 광주 북구 망월동에 자리한 경열사는 1981년 정지 장군의 묘소 인근에 다시 세워진 사당으로, 오늘날에는 정지 장군만을 배향하고 있다.
정충신은 출신 신분을 넘어선 충절과 무공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광주 지역사와 시민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