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숙
기본 정보
| 이름 | 양산숙 |
|---|---|
| 한자명 | 梁山璹 |
| 이칭 | 회원(會元)(자), 충민(忠愍)(시호), 반계(蟠溪)(호) |
| 위도(latitude) | 35.168861 |
| 경도(longitude) | 126.741607 |
| 생몰년도 | 1561~1593 |
| 성별 | 남성 |
| 출생지 |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 |
정의 및 개요
특징
- 양산숙(梁山璹)[1561~1593]의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회원(會元),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 양사위(梁思渭)의 후손이다.
- 증조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 할아버지는 양팽손(梁彭孫), 아버지는 양응정(梁應鼎)이다. 어머니는 박중윤(朴仲允)의 딸 죽산박씨(竹山朴氏)이다.
- 양산숙은 양산룡의 동생이자 양산수의 형이다.
- 시국이 혼란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여 은거했다.
- 1589년(선조 22년) 조헌이 시폐를 비판하다 유배되자 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기축옥사가 발생할 당시 조헌이 정여립의 반역을 예언한 일이 충성심으로부터 나왔다고 그의 원통함을 아뢰었다.
-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형 양산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을 장군으로 추대하여 강화로 진을 옮겼다. 밀서를 가지고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도달하여 남부지방의 소식을 알렸다. 이에 선조는 양산숙을 공조좌랑에 임명했다.
- 양산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 1635년(인조 13) 때 전라도 생원 홍탁 등의 상소로 양산숙과 양씨 집안의 효자, 열녀, 절부 등을 표창하여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이때 양산룡은 효자료 정려되었다. 1803년, 정려문에 '양씨삼강문'이라는 현판이 제작되었다. 이헌중이 '양씨삼강문' 현판을 썼다.
- 양씨삼강문은 1985년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양씨삼강문 | http://aks.ai/GC60001001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양산숙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578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양송천 묘역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19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양산숙 | 양사위 | 양산숙은 양사위의 후손이다 | ||
| 양이하 | 양산숙 | 양이하는 양산숙의 증조할아버지다 | ||
| 양팽손 | 양산숙 | 양팽손은 양산숙의 할아버지다 | ||
| 양응정 | 양산숙 | 양응정은 양산숙의 아버지다 | ||
| 양산숙 | 양산룡 | 양산숙은 양산룡의 동생이다 | ||
| 양산숙 | 양산수 | 양산숙은 양산수의 형이다 | ||
| 양산숙 | 박뫼마을 | 양산숙은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 ||
| 양산숙 | 양씨삼강문 | 양산숙은 효자로 정려를 받아 양씨삼강문에 이름이 올랐다 | ||
| 양산숙 | 양송천묘역 | 양산숙의 묘는 양손천묘역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