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사
기본 정보
| 이름 | 화담사 |
|---|---|
| 한자명 | 花潭祠 |
| 영문명 | Hwadamsa |
| 위도(latitude) | 35.1537289 |
| 경도(longitude) | 126.8783446 |
| 종류 | 사우 |
| 건립연도 | 1735년(영조 11)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781-23 |
| 국가유산 지정/등록 | 광주광역시 기념물 |
정의 및 개요
건립 배경
- 화담사는 1735년(영조 11) 조정의 명을 받아서 사경과 예법에 뛰어나고 청렴결백한 문절공(文節公) 정수충[1](鄭守忠, 1401~1469)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으로 건립되었다.
- 화담사는 1776년(영조 52) 정수충 후손인 하동 정씨(河東鄭氏) 문중과 광주 유림들이 사우 건립을 발의하여 1784년(정조 8) 정수충을 배향하면서 사당의 격을 갖추었다.
건축문화적 특징 및 가치
- 화담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앞쪽에는 넓은 마루가 있다.
- 건물 앞쪽으로는 내삼문인 양양문(洋洋門)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중간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인 동재[2]와 서재[3]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4](前學後廟) 양식을 갖추고 있다.
관련 행사 및 사건
- 화담사는 1796년(정조 20) 광주 유회소의 발의로, 이인좌의 난(1728년)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광주 출신 충장공(忠壯公) 민제장(閔濟章, ?~1729)을 추배하였다.
- 화담사는 1809년(순조 6)에 충청도 유회소가 발의하여 고려 멸망 후 조선의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묵은공(黙隱公) 정희[5](鄭熙, 1350~?)를 추배하였다.
- 화담사는 1809년(순조 6) 세종 때 대제학을 지낸 문경공(文景公) 정초[6](鄭招, ?~1434)도 함께 추배되었다.
- 화담사는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서원철폐령 때 위기를 맞았으나 지붕을 덮어 은폐, 보존하여 제사는 폐하고 사우와 다른 건물들은 훼철을 피할 수 있었다.
- 1905년(고종 42) 광주향교를 중심으로 한 광주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 화담사는 1906년 약포공(藥圃公) 정오도[7](鄭吾道, 1647~1736)를 추배하면서 정희의 위패를 중앙에 두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외 정보
- 화담사에는 화담사중수비(花潭祠重修碑)가 있다. 하동 정씨 문중과 화담사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화담사 | http://aks.ai/GC60001004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화담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568 |
| 웹리소스 | 국가문화유산포털 | 화담사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sngl=Y&ccbaCpno=2332400180000 |
| 웹리소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 화담사 | http://www.gjsgcc.or.kr/ko/25/view?SEQ=73 |
주석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화담사 | 화정동 | 화담사는 화정동에 있다. | ||
| 화담사 | 정수충 | 화담사는 정수충의 영당으로 건립되었다. | ||
| 화담사 | 정희 | 화담사는 정희를 추배하였다. | ||
| 화담사 | 민제장 | 화담사는 민제장을 추배하였다. | ||
| 화담사 | 정초 | 화담사는 정초를 추배하였다. | ||
| 화담사 | 정오 | 화담사는 정오도를 추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