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동팔거리
기본 정보
| 이름 | 학동팔거리 |
|---|---|
| 한자명 | 鶴洞八距離 |
| 이칭 | 팔거리마을 |
| 위도(latitude) | 35.1308096 |
| 경도(longitude) | 126.927791 |
| 설립(조성)시기 | 1936년 |
| 소재지 | 광주 동구 남문로693번길 11 |
정의 및 개요
특징
- 마을 둘레를 한 바퀴 도는데 20분 정도 걸리는 약 1만평의 마을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공동우물이 있는 작은 광장이 나오고, 광장을 중심으로 여덟 갈래의 길이 방사선형으로 뻗어있었다.
- 학동팔거리는 장방형 단지 중앙에 팔거리를 두고 단지 네 모서리 부분에 각각 하나씩 네 개의 팔거리를 두어 모두 5개소에 팔거리를 배치했다.
- 그러므로 한 길을 선택해 들어가면 다시 작은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을 중심으로 여덟 갈래의 길이 뻗어 나가 다른 팔거리 중심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마을이 연결되었다.
- 해방 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재개발 전까지 골목길의 기본 형태는 그대로 유지해었다.
- 지금은 재개발로 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서 팔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관련 행사 및 사건
- 전국적으로 유일했던 학2동의 팔거리마을은 1936년 일제가 광주천 직강공사를 위해 광주천변에 살던 빈민들을 이곳으로 집단 이주시키면서 만들었다.
- 일제가 영국 철학자 제라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인 판옵티콘의 실사판이라는 말을 듣는 특이한 형태의 거주지를 만든 것은 이주 빈민들에 대한 감시를 쉽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이들을 ‘방면위원’으로 임명,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고하게 하고, 수시로 종을 울려 주민들을 집합시켰다고 한다.
- 팔거리 중앙광장은 일제강점기에는 주민 감시의 중심지였으나. 해방 후에는 마을 사랑방처럼 주민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는 옛 주민들의 전언이다. [1]
그 외 정보
- 팔거리마을 바로 옆에는 백화마을이 있었다.
- 1946년에 광주를 방문한 백범 김구가 낸 기금을 재원으로 집을 지은 전재민(戰災民) 정착촌이다. ‘100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김구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 백화마을 가옥들은 말집이라고 불렸는데, 집 구조가 한 지붕 아래 6가구가 나란히 이어진 마구간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백화마을도 재개발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같은 이름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인근 광주백범기념관과 학동역사공원에서 팔거리마을과 백화마을의 옛 흔적을 볼 수 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이미지
지도
참고자료
주석
- ↑ 광주드림, 「8거리도, 주민도, 당산나무도…자료만 남은 학동 8거리」(2014-04-17, 황해윤 기자)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학동팔거리 | 광주천 직강공사 | 일제의 빈민촌 조성 이유 | ||
| 학동팔거리 | 판옵티콘 | 팔거리마을 형태 | ||
| 학동팔거리 | 학동역사공원 | 팔거리마을 옛모습 사진 있음 | ||
| 학동팔거리 | 방면위원 | 일제가 임명한 마을감시자 | ||
| 백화마을 | 전재민 | 백화마을 주민 구성원 | ||
| 백화마을 | 말집 | 백화마을 가옥 구조 | ||
| 백화마을 | 김구 | 백화마을 주택 건설 기금 출연 | ||
| 백화마을 | 광주백범기념관 | 백화마을 및 광주와 김구 인연 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