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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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

기본정보

장진홍
항목 내용
출생 1895년 6월 6일
출생지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
사망 1930년 7월 31일 23시경

생애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

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

ⓒ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30.2.18.) ⓒ 동아일보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

윤세주와 이육사의 관계
구분 윤세주 이육사 관계 설명
소속·활동 기반 의열단, 조선의용대 의열단 계열 연락·정보조직 같은 항일 네트워크에서 활동
주요 역할 무장투쟁·군사조직 운영 정보·연락·저항문학 서로 보완적 역할
활동 무대 중국 난징·우한·안후이성 등 중국 베이징·난징·항주 등 활동 시기 및 지역이 겹침
이념 성향 민족해방 + 사회주의 성향 민족해방 + 사회주의 성향 사상적 공통점 큼
직접 협력 여부 명확한 공동 작전 기록은 적음 의열단 인맥을 통한 연계 동지적·항일전선 연대 관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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