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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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1927년 10월 18일, 한 낮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잠자고 있던 한 민족에게는 독립의 함성이였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한낮의 우렛소리였다."
이 사건은 장진홍이 일제에 저항하고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하여 폭파시킨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군사적인 항일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 투쟁은 주로 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투쟁의 대상은 조선은행과 같은 경제 착취 기관이나 도청, 경찰서, 법원 같은 식민 통치 기구에 집중되었다. 장진홍은 1907년 인명학교 학생 때부터 항일의식을 배웠으며, 1916년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7년 4월, 장진홍은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만났다. 공산주의자였던 굴절무삼랑은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장진홍에게 폭탄 제조법과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했다.

사건 설명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후 봉화산에서 성능 실험을 마쳤다. 이후 그는 거사용 큰 폭탄 4개와 자살용 소형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조했다. 1927년 10월 17일, 장진홍은 폭탄을 싣고 대구로 이동하여 덕흥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장진홍이 노린 대상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식산은행 대구지점, 그리고 경북경찰부 네 곳이었다.

10월 18일 오전 9시경, 장진홍은 폭탄에 점화포장을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거사 목표지점 4곳에 송달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중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폭탄 1개만이 같은 날 오전 11시 50분쯤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70여 장이 파손되었다.

나머지 3곳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이유는,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폭탄 상자에서 화약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길촌결이 이를 인지하면서 나머지 폭탄의 배달에 문제가 생겨 3개 지점의 폭파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와 의의

장진홍의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이육사 시인 외에도 그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

"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

"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

"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

"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않을 것이다!"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