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ᐧ༚̮ᐧ
| 장르 | 여행기 |
| 작가 | 박지원 |
| 시대 | 1780년 - 조선 후기 |
| 배경 | 청나라 답사 |
장르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이다.
작가
| 출생 | 1737년 3월 5일 |
| 사망 | 1805년 12월 5일 |
| 호 | 연암(燕巖)[1],연상(煙湘) |
| 저서 | 열하일기, 양반전 |
| 직업 | 소설가, 실학자 |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2]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 배경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 파견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