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ᐧ༚̮ᐧ
| 장르 | 여행기 |
| 작가 | 박지원 |
| 시대 | 1780년 - 조선 후기 |
| 배경 | 청나라 답사 |
장르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이다. 여행기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경험한 제반사항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의 총체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접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하여 삶에 응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목적적 여정으로, 인생에서 펼치는 다양한 유람과 놀이,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견문 확장, 그리고 삶의 도전과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문학작품으로써의 여행기는 인생을 각성하는 계기를 주고, 생애를 숙고하고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하며, 문화 간의 소통과 융합, 현실세계에 실천하고 적용하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또다른 여행기로 1712년 김창업이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사행을 다녀온 후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상세히 기록한 가재연행록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의 기록, 외교 사행이나 이국 풍물기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떠나 ‘타자’와 마주하며, 조선이라는 체제와 문명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탐색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준다. 여행기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행기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 출생 | 1737년 3월 5일 |
| 사망 | 1805년 12월 5일 |
| 호 | 연암(燕巖)[1],연상(煙湘) |
| 저서 | 열하일기, 양반전[2] |
| 직업 | 소설가, 실학자 |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3]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박지원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박지원이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박지원이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배경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연암이 속한 사행단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라는 명칭을 지녔다. 진하는 황제의 생일이나 즉위 같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려나 조치를 감사하기 위한 사행이다. 이 특별한 사행의 목적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함과 동시에, 1년 전 조선사행의 실수로 북경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 조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의 관용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행단의 총 인원은 270명. 『열하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사행을 떠난 노이점이 쓴 『수사록』에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행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박명원은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이었다. 자제군관은 일종의 개인 수행원으로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박지원이 청의 문물, 문화 등과 매우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열하일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4]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 지 15일 만에 요양(遼陽)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7월 10일 십리하(十里河)를 출발하여 판교보(板橋堡), 장성점(長盛店), 사하보(沙河堡)를 거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박지원은 심양에서 하루를 묵은 뒤 거류하(巨流河)를 거쳐 14일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7월 15일에 신광녕(新廣寧)을 거쳐 산해관(山海關)까지 9일이 걸렸으며, 산해관에서 연경까지는 11일이 걸렸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300여 리로 긴 여정이었다.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열하로 가는 길에는 부사 서장관과 역관 3명, 비장 4명, 하인 등 모두 74명이 동행했다.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비가 자주 와 시간이 지체되어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며 서두르기도 하였다. 말이 더위에 쓰러지고, 일행 역시 더위를 먹을 정도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고 한다.
내용
총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열하까지의 여정, 여행에서의 인상 깊었던 점, 가지각색의 체험,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등이 담겨 있다.
큰 틀에서 열하일기는 날짜 별로 서술이 되어있다. 의주에서 연경까지를 도강록(渡江錄), 성경잡지(盛京雜識), 일신수필(馹汛隨筆), 관내정사(關內程史)로 나누어 기록했으며,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우선, 도강록에는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7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의 기록인 성경잡지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화이론과 춘추대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이용후생하는 중국인들의 자세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열하일기에는 주제별로 항목을 정해 청 학자들과의 교류내용과 정책에 대한 논평, 경험한 것들에 대한 박지원의 생각이 들어있기도 하다. 망양록(忘羊錄)에서는 청 학자들과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심세편(審勢篇)에서는 조선사람의 다섯 가지 허망된 일[五妄]과 중국 선비들의 세 가지 어려운 일[三難] 등에 대해 상호 토론하였다.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는 윤가전(尹嘉銓)과 천문 및 역법, 서학(西學) 등에 관해 얘기하였고,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는 열하에서 체험한 반선(班禪)에 대한 내용과 건륭제의 반선 정책, 청과 주변 이민족이 지닌 각종 종교에 대해 정리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열하일기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마을의 커다란 가옥과 반듯한 거리, 벽돌로 쌓은 담장, 수레, 책문의 규모나 시설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마을 내 우물의 모습, 물을 깃는 방법, 기와를 잇는 방법, 벽돌을 사용하는 데 이로운 점, 가마제도 등 청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 모습까지도 세세히 기록하며 조선 백성들이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함과 동시에 청의 선진문물이 가진 실용성과 효용성에 주목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많은 부분은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청의 학자,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과 교류함으로써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반청사상에서 벗어나 청의 문화를 사실적,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참고문헌
연암을 따라, 사유의 자취를 걷다(1) 연암, 조선을 넘어 청나라로 - 김경민·곽영군 기자 https://www.hynews.kr/news/view.php?idx=74157
우리역사넷 - 열하일기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735&code=kc_age_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