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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시어는 두 가지로, 1연의 '사월'과 2연의 '동학년'이다. 이 시어들은 각각 4.19혁명과 동학농민운동을 의미한다. 두 가지 사건은 민주, 자유를 열망한 이들의 저항과 혁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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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은 [[현대]] 페이지의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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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은 시가 창작된 시기와 그 발생 시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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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운동, 혹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이 농민운동은 1894년(고종31)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그 원인이 된 것은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횡포와 가렴주구에 대한 농민층의 분노였다. 이러한 분노는 동학의 종교적 성격과 더해져 농민혁명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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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봉기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청국에 원병을 요청한다. 청국이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함에 따라 일본 역시 파병을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서울에 들어왔다. 이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전봉준의 분노를 불렀고, 농민군은 그들을 축출하기 위해 다시 봉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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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세성산에서 농민군과 관군, 일본군의 접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으며, 이후 웅치 방면을 총공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는 패배를 겪는다. 이어지는 우금치에서의 공방전에서, 농민군은 운명을 걸고 전투에 임했으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에게는 대적하지 못했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참패한다. 주력부대 1만여 명 중 살아남은 500여 명은 항전을 계속하다 결국 해산하고 만다. 대략 1년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였으나, 참전했던 동학농민군이 이후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고, 그 맥락이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결코 헛되지 않다. <ref>"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865</ref>
  
 
== 작가 ==
 
== 작가 ==

2025년 6월 23일 (월) 16:02 판

작품 개요

항목 내용
제목 껍데기는 가라
작가 신동엽
발표 연도 1967년
갈래 서정 갈래
시대적 배경

전문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주요 특징

배경

주목해야 할 시어는 두 가지로, 1연의 '사월'과 2연의 '동학년'이다. 이 시어들은 각각 4.19혁명과 동학농민운동을 의미한다. 두 가지 사건은 민주, 자유를 열망한 이들의 저항과 혁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4.19 혁명은 현대 페이지의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시가 창작된 시기와 그 발생 시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동학운동, 혹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이 농민운동은 1894년(고종31)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그 원인이 된 것은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횡포와 가렴주구에 대한 농민층의 분노였다. 이러한 분노는 동학의 종교적 성격과 더해져 농민혁명으로 전개되었다.

정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봉기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청국에 원병을 요청한다. 청국이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함에 따라 일본 역시 파병을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서울에 들어왔다. 이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전봉준의 분노를 불렀고, 농민군은 그들을 축출하기 위해 다시 봉기하기로 한다.

그 결과 세성산에서 농민군과 관군, 일본군의 접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으며, 이후 웅치 방면을 총공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는 패배를 겪는다. 이어지는 우금치에서의 공방전에서, 농민군은 운명을 걸고 전투에 임했으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에게는 대적하지 못했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참패한다. 주력부대 1만여 명 중 살아남은 500여 명은 항전을 계속하다 결국 해산하고 만다. 대략 1년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였으나, 참전했던 동학농민군이 이후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고, 그 맥락이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결코 헛되지 않다. [1]

작가

신동엽 (申東曄)
신동엽.jpg
이름 신동엽 (申東曄)
출생/사망 1930년 8월 18일 ~ 1969년 4월 7일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활동 시기 1960년대 (현대)
문학 사조 참여시
문학적 특징 현실에 대한 비판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