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목차
문학의 흐름
| 연대 | 서정 갈래 | 서사 갈래 |
|---|---|---|
| 1950년대 | 이념시 순수시 |
귀향소설 분단문학 전쟁소설 |
| 1960년대 | 현실 참여시 순수 서정시 |
참여문학 순수문학 |
| 1970년대 | 민중시 노동시 |
순수소설 |
| 1980년대 | 민중시 서정시 해체시 |
역사 장편 대하소설 |
1950년대
1950년대, 특히 한국전쟁의 종전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3년간은 정치와 사회 및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분열, 문인들의 월북과 월남 및 전향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시기 좌우익 문학단체의 난립과 정치적 이념 대립, 더불어 진보적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부르조아 민주주의 민족문학의 대립과 우익 순수문학과 좌익 마르크스주의 문학의 대립은 1948년 정부수립으로 인한 좌익측의 월북과 보도연맹 가입으로, 우익 민족주의 노선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1]
전쟁과 이념의 혼란 속에서도 예술로서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추구하는 시적 경향이 공존했다. 순수시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인간 내면, 자연, 언어의 본질 등을 탐구하며, 전통을 수립하려는 이론적 노력이 수반되었다.[2] 1950년대는 해방, 분단, 한국전쟁 등 격동의 역사 속에서 이념적 대립이 시문학에 깊이 반영되었다. 좌우 이념 논쟁, 전쟁기의 선전문학과 순수문학의 갈등, 실존주의 문학 등이 혼재하며 시의 담론이 형성되었다.
전쟁 이후 전후문학이 출현하는 것은 보편적인 흐름이듯이 이 시기에는 전후문학은 물론 전후문학의 한 갈래로 취급되기도 하는 귀향문학[3] 이 등장했으며, 남북 분단으로 인한 상처 등을 다룬 분단문학이 등장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전후문학의 대표 작가로는 손창섭, 장용학, 오상원 등이 있다. [4]
1960년대
1960년대는 4.19의 성공과 좌절을 시작으로 하여 참여문학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1966년 창간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창간호에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에서 순수와 참여 논쟁이 지니는 의미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다루어져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우리 나라 현대문학사에서 참여문학이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며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
문학의 사회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현실 참여시와 참여소설이 등장하였다. 참여시의 경우 문학의 사회참여보다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를 일순위로 삼는 순수문학과는 대비되게 시인은 시를 창작함으로써 현실에 참여한다고 보았으며,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김수영, 이성부, 신동엽이 있다.[6] 참여소설의 경우 사회비판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성격의 작품으로 사회적 모순에 대해 지식인이 어떠한 역할을 취해야 할지 고뇌하였으며 대표적인 작가로는 황석영, 박태순, 조세희 등이 있다.
이 시기 참여문학 문인들에게 찬성하지 않는 문인들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며 대립했다. [7]
1970년대
1970년대는 백낙청 등의 주장으로 민족문학론이 적극적으로 논의를 펼쳤고, 이 때의 민족문학론은 시민문학이 중심이 되었다가 이후 민중문학으로 전환된다. [8]
이 시기 서정문학은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 등 사회적 빈곤층인 민중의 관점에서 시가 창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민중들이 처한 현실의 모순은 1970년대 독재정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9]
1980년대
1980년대에는 시민문학이 소시민적 민족문학록이라는 비판과 함께 새로운 민족문학을 건설해야 한다는 민중문학론이 대두된다. 한편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순수와 참여의 대립 양극구도가 이어져 모더니즘과 민중적 리얼리즘의 대립이 나타나기도 한다.
서정문학 역시 70년대의 민중시 경향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노동자 본인이 창작의 주체가 되어 삶의 현장 체험이 시의 창작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박노해, 백무산 등이 있으며, 주로 사회 구조의 모순과 이로 인해 희생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었다. [10]
역사의 흐름
본 문서는 한국사의 모든 사건을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해당 프로젝트의 목적인 문학과 역사를 연결하는 것에 집중하여 한국 현대문학사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는 사건들을 선별하여 작성하고자 한다.
8.15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음
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이 독립을 맞이하고,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를 가진 광복은 압제에서 벗어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의 패전이 그 요인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 간 우리 민족의 광복운동이라는 주체적 요인이 없었다면 귀결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 역시 타당하다. [11]
그러나 광복 이전에 민족독립이 통합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광복 이후 미국, 소련의 개입으로 인해 민족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하는 단계에 접어들며 결국 1946년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을 시사, 1948년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다. 한편 북한에서는 대한민국 수립 전 7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나라는 갈라지게 된다.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
미국과 소련의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남북한이 각각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곧 국경선이 되었다. 1949년부터 북한은 소련과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도 하는 등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군사력이 갖추어진 이후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구상하고,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한다.[12]
1. 북한군의 우세
초전에 막강한 군사력을 이미 갖춘 북한군이 우세했던 것은 당연하다. 6월 27일 서울이 점령되었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남진하였다. 미 제24보병단의 저지 역시 큰 효과는 없었고, 결국 유엔군은 부산 중심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을 계획한다.
2. 인천상륙작전
7월 15일부터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를 중심으로 구상되기 시작한 인천상륙작전은 9월 8일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해병대는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함락시킨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은 9월 26일 서울에 진입, 북상을 이어가며 전세를 뒤집는다.
3.중공군의 참전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이는 무시되고, 11월 4일 중공의 참전이 공식 발표된다. 맥아더는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의 제안에 불복하고 진격을 이어갔으나, 11월 25일과 26일 중국군의 서부전선 공격으로 방어선이 붕괴, 4일만에 '12월 후퇴'가 이루어진다. 이에 힘입은 북한군은 다시 남진을 개시하여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국 정부와 민간인들은 다시 피난길에 오르는데 이것이 1.4 후퇴이다. 이후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여 전진, 2월 10일에 인천과 김포 탈환, 3월 14일에 서울 재탈환, 3월 24일에 38선 돌파를 이뤄낸다.
4.휴전의 성립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양측 모두의 필요에 따라 휴전문제가 구체화되었다. 유엔군 측에서는 제한전쟁을 목표로 하고 있던 이유로, 공산국 측에서는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휴전이 필요했고, 소련 유엔대표인 말리크의 휴전문제 제기와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의 휴전회담 제안에 따라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린다. 이후 경계선의 책정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회담은 10월 25일 판문점에서 다시 시작되지만, 포로 송환 문제로 또다시 결렬된다. 이후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당사국들의 요건을 충족하여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이승만 정권
| 이름 | 이승만 |
|---|---|
| 출생/사망 |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
| 출생지 | 황해도 평산 |
대한민국 제 1,2,3대 대통령
1948년 7월 20일 선출되어 7월 24일 제 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 5일 74.6%의 지지로 제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게는 적용하지 않도록 개정, 1956년 5월 15일 56%의 득표로 제 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개헌이 '사사오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헌법개정에 필요한 재적 인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에 미치지 못한 135표 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당간부회가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기 때문에 사사오입, 즉 반올림하면 135이고, 이는 곧 헌법개정안의 가결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헌법개정은 억지스러운 논리로 불명예스러운 명칭을 얻게 되었다. [13]
이후 1960년 제 4대 대통령선거와 제 5대 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를 감행하였고, 이는 곧 4.19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14]
4.19 혁명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가 극에 달했다. 애초 공무원과 경찰 등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으며 야당선거원들은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농촌지역에서는 투표를 위해 3인조, 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어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보증했다. 심지어 개표가 시작되자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95%~99%까지 조작되어 나온 지역이 속출했고, 자유당 측에서도 놀라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기를 지시했다는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한다.
이에 4월 초, 전국에서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여론이 일었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 최루탄을 눈에 맞은 채 해변가에 버려진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신이 기폭제가 되어 혁명이 전개되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경찰의 발포 시작으로 이 시위는 가열되었다. 학생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가담하며 이승만은 이 시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4월 21일 내각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이후 부통령이었던 장면 역시 부통령직을 사퇴했고, 시위대는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다.
이승만이 사회단체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경찰 등 정부관리들의 정치적 간섭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멈추지 않았고, 4월 25일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 역시 제자들을 지지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한다.
이러한 시위의 물결과 경찰력의 붕괴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한다.[15]
박정희 정권
| 이름 | 박정희 |
|---|---|
| 출생/사망 |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구미 |
대한민국 제 5, 6, 7, 8대 대통령
박정희는 4.19 혁명으로 성립된 정부를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로 규정,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삼권을 장악한다. 이에 따라 장면 정권은 9개월 만에 무너지고 군정이 시작된다. 쿠데타의 성공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그 명칭을 고쳐 내각을 조직하는 기능을 하게 되고, 박정희 소장은 군사정부의 실권자로 부상한다. 이후 1963년 10월 15일에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다.
1972년 10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의 해산, 정당활동 금지를 급작스럽게 선언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유신헌법'의 제정에 따라 제 8대 대통령에도 역시 박정희가 선출되며 제4공화국이 시작된다.[16]
유신체제는 명목상으로라도 유지되고 있던 민주주의를 거의 완전히 무력화시켰으며, 대중의 반발을 수렴할 장치도 없었다.[17] 따라서 10.26 사태로 유신체제가 끝을 맞을 때까지 전국민적 저항과 정권의 탄압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8]
전두환 정권
| 이름 | 전두환 |
|---|---|
| 출생/사망 | 1931년 1월 18일 ~ 2021년 11월 23일 |
| 출생지 | 경상남도 합천 |
대한민국 제 11, 12대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12.12 사태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 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제 11대 대통령 취임 후 유신헌법을 일부 수정하여 대통령 임기 7년 및 간접선거 선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였고, 새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3월 3일 취임함에 따라 제 5공화국이 출범된다.
1981년 5월 학생과 시민의 지지를 위해 축제인 국풍81을 개최하는 한편 3S 정책을 펼쳐 야구와 축구 등 프로리그가 출범했다. 그러던 1987년 1월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언론에 퍼졌고, 이를 기폭제로 하여 많은 국민이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외치며 집회에 나선다. 이에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고 4.13 호헌조치를 선언했는데,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는 6월 민주항쟁의 밑받침이 되었다.
1995년 12.12 군사반란 가담과 뇌물 수수 등으로 기소되어 1997년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이 확정되었다. [19]
참고문헌
- ↑ "문학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736
- ↑ 최호빈, <해방 후 한국 현대시론의 형성 과정 연구>,2016.
- ↑ "귀향문학", 문학비평용어사전,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29665&cid=60657&categoryId=60657
- ↑ "전후문학",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457917&cid=46645&categoryId=46645
- ↑ "참여문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2587&cid=46645&categoryId=46645
- ↑ "참여시",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556577&cid=40942&categoryId=32861
- ↑ "순수문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9292&cid=46645&categoryId=46645
- ↑ "민중문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21479&cid=46645&categoryId=46645
- ↑ "민중시",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71870&cid=40942&categoryId=32861
- ↑ "민중시", 위와 같음.
- ↑ "8.15광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769
- ↑ "한국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 ↑ "사사오입 개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81
- ↑ "이승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938
- ↑ "4·19혁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902
- ↑ "박정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134
- ↑ "10월유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425
- ↑ "10월유신", 한국근현대사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15&cid=62048&categoryId=62048
- ↑ "전두환",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9462&cid=40942&categoryId=33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