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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ref>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ref>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p>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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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ref>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ref>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p>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
 
== 배경 ==
 
== 배경 ==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 파견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 파견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2025년 5월 30일 (금) 09:2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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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장르 여행기
작가 박지원
시대 1780년 - 조선 후기
배경 청나라 답사

장르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이다.

작가

ㅣleft

박지원 朴趾源
출생 1737년 3월 5일
사망 1805년 12월 5일
연암(燕巖)[1],연상(煙湘)
저서 열하일기, 양반전
직업 소설가, 실학자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2]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

배경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 파견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내용

  1.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호이다
  2. 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