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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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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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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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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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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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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ref>현재의 경상북도 안동</ref>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ref>1919년에 찯단했다</ref>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ref>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ref>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황혼>, <신조선>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 내용 및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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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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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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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2025년 6월 23일 (월) 19:29 판

광야
장르 저항시, 서정시
작가 이육사
시대 1945년 - 근대
배경 일제강점기

원문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배경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작가

ㅇㅇㅅ.jpg

이육사 李陸史
출생 1904년 5월 18일
사망 1944년 1월 16일
본명 이원록(李源祿)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
직업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

이육사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1]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2]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3]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황혼>, <신조선>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내용 및 해석

참고문헌

각주

  1.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
  2. 1919년에 찯단했다
  3. 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