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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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현황

지역

함경도

특징

  • 대체로 함경남·북도를 그 구획에 넣고 있지만, 그 남쪽 경계는 도계가 아니고 함경남도 영흥과 정평 사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동북 방언 내에서도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육진 지역의 방언을 육진방언이라 하는데, 이 방언은 함경도 내의 다른 방언과 약간 다른 특성을 지닌다. 이 방언은 지리적으로 중앙에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사방이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인 성격을 띤다.
  • 대체로 어휘적으로는 동북방언과 큰 차이가 없으나 음운체계와 종결어미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여 동복방언의 한 하위 방언권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독립방언권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지역적 특성

동으로는 동해와 접해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중국 및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서쪽에는 낭림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평안남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옛부터 관북으로 통하는 주요한 교통로는 추가령지구곡과 함남 남부의 안변 또는 문천을 잇는 곳으로 발달하였다. 이렇게 삼면이 고립되고 또 정치·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동북 방언은 자연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언어적 특성

어휘

  • 가매치(누룽지), 겡게(감자, 함북), 동삼(겨울), 불슬기(기차), 배짜개(질경이), 산디쌀(찹쌀), 쉐투리(씀바귀), 아슴채이오(고맙소, 육진: 아슴태니오) 등
  • 고어의 잔재: 중세국어 또는 근대국어 시기에 쓰이다가 지금은 동북 방언권에 잔조해 있는 어휘: 간대르사(설마), 기티다(남기다), 나조(저녁), 널;다(씹다), 드티우다(건드리다), 무리(우박), 슷다(물기를 수건 따위로 닦다), 신다리(허벅지) 등
  • 중부 방언과 형태는 같고 뜻이 다른 말:

닦다(볶다), 마누래(천연두), 바쁘다(어렵다, 힘들다), 분주하다(시끄럽다), 삐치다(참견하다), 소나기(우레), 싸다(사다), 지껄이다(집적거리다), 한심하다(위태롭다)

  • 지리적으로 이웃한 중국 및 러시아와 접촉이 잦아지면서 그쪽의 언어를 차용하여 쓰게 되었다.
<인접한 나라에서 차용한 어휘> 출처:"동북방언(곽충구)"
구분 1 2 3 4 5
중국어 -광차이(삽) 다두배채(양배추) 마우재(러시아인) 만튀(만두) 빙고(썰매)
러시아어 가름다시(연필) 거르마니/거르망(호주머니) 마선(재봉틀) 메드레(바께쓰) 물라깨(안전핀/옷핀)
여진어, 만주어 도로기(소가죽으로 만든 신) 마우래/마우래기(방한용 모자) 야래(두만강에 서식하는 고기 이름) 오로시(가죽신) 쿠리매(외투)

문법

  • 해방 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동북 방언 중 함경 방언은 10모음 체계, 육진 방언은 전설 원순모음 ‘ㅚ’와 ‘ㅟ’가 없는 9모음 체계였으며, 현재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함경 방언 화자들도 대체로 10모음 체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 국어에서는 모음 체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육진 방언에서는 ‘ㅟ’가 새로 등장한 반면, 함경 방언은 ‘ㅟ’와 ‘ㅚ’의 비음운화(‘ㅟ’는 [i] 또는 [we]로, ‘ㅚ’는 [e]로 변화]로 10모음 체계에서 8모음 체계로 줄었다.
  • 'ㅡ’와 ‘ㅜ’ 및 ‘ㅓ’와 ‘ㅗ’의 조음역이 중부 방언과는 다르다. 이들은 ‘원순성’ 자질에 의하여 대립되는 후설모음들인데 대립 모음들의 조음역이 근접해 있다. 중부 방언의 ‘ㅓ’는 그 조음역이 꽤 넓은 편인데, 동북 발언에서는 중부 방언의 그것보다 다소 고설 위치에서 조음된다. 그리고 ‘ㅗ’의 원순성 약화가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때문에 ‘ㅗ’와 ‘ㅓ’의 대립이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조음상의 특징은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현저한다.
  • 'ㅅ’ 및 ‘ㅂ’ 변칙 용언들이 대체로 함남의 중부 이북 지역에서는 정칙 활용을 한다. eg. 칩다(춥다), [치버서], [치부니] // 잇다(육진 방언은 ‘닛다’), [이서서], [이스니]
  • 모음이나 ‘ㅇ’으로 끝난 명사에 ‘이’가 결합되어 어간의 일부로 녹아드는 예가 많다. eg. 치매(치마), 장개(장가), 장시(장수), 염튀(염통) 등. 이런 이유로 전통적인 동북 방언 어휘 중에서 개음절 명사는 전설 모음으로 끝나는 형태소 구조 제약을 가진다.



역사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에 그에 복속되었던 말갈족의 일파가 남진함에 따라, 고려 시대에는 정평 이북 지방이 여진족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도 함경도에는 ‘두만강’의 ‘두만’을 비롯하여 ‘나단(산)’, ‘주을’, ‘아오지’, ‘백안(수소)’, ‘쌍개’와 같은 여진말에서 유래한 소지명이 남아 있다.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을 전후해서 고려의 통치가 미치지 않던 이곳으로 적지 않은 유이민 옮겨 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목조 이안사가 전라도 전주를 떠나 함경도 지역으로 집단 이주했던 사실이 그 한 예이다. 때문에 여말 선초에는 이미 상당수의 고려인이 함북의 두만강 하류 지방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조 태조 때에는 이 지역의 왕조가 발원한 ‘조기지지’라 하여 돌보고 여진 지명을 현재의 지명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오도리, 우디거, 오랑캐와 같은 여진족과 마찰이 잦았는데, 세종이 그들을 제압하고 두만강 유역에 육진을 설치하였다. 함경도가 명실공히 국토의 일부가 된 것은 이때부터다. '동북 방언권’, 즉 정평 이북 지방은 고려 시대에는 평북 의주와 함남 정평 부근의 도련포를 잇는 천리장성의 북쪽에 위치했던 곳이다. 그리고 ‘육진 방언권’은 바로 세종 때에 개척되고 관의 사민정책에 따라 길주 이남의 함경도인과 하삼도 주민이 대거 이주한 곳이다.



매체에서의 등장

  • 정도전
  • 웰컴 투 동막골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동북방언, [1]
  • "동북 방언", 곽충구,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