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鄭芝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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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생애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풍랑몽>을 씀.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석류>, <바다> 등을 씀.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를, 그리고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창간
1933년 <<가톨릭청년>>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

주요활동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신라의 석류>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바다>, <향수>, <선취>, <압천> 등이 있다.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

작품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 〈석류〉
  • 〈바다〉
  • 〈유리창〉
  • 〈불사조〉
  • 〈향수〉
  • 〈고향〉
  • 〈장수산〉
  • 〈백록담〉

시집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
    - 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 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
  • 『지용시선』(1946)

평론·산문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

평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고,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