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鄭池龍)
| 정지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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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02년 6월 20일 |
|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
| 자 | 영지(靈之) |
| 본관 | 연일 정씨 |
개요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옥천공립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수학 1929년 9월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영어과 교사로 취임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1946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48년 2월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했으며,
생애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남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재학 중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이태준을 만나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동인을 결성, 동인지 <<요람>>을 10여호까지 펴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풍랑몽>을 씀.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석류>, <바다> 등을 씀.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를, 그리고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 1929 도시샤 대학 졸업, 고국에 돌아와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창간하고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틈. 1933년 <<가톨릭청년>> 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 반 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한 ‘9인회’를 만듦.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1946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48년 2월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 <<문장>>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에서 그의 투철한 민족애를 읽을 수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한국전쟁 이후 월북 문인으로 규정되어 상당 기간 동안 정지용의 작품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1982년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납북되었다고 하며 정지용의 저작물 복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고, 원로 문인들과 학계도 이에 합세하여 정지용 문학의 복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쉽게 복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점차 완화되고, 대학에서 월북 문인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현실에 발맞춰 1987년 10월에 월북 문인에 대한 연구 성과물의 발표와 판매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1987년 『정지용연구』가 발간되었으며, 1988년 『정지용 시와 산문』, 민음사에서 시와 소설로 나뉘어 『정지용전집』 2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는 공식적으로 정지용 작품의 해금(解禁)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결성되었으며, ‘제1회 지용제’가 개최되었다.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박두진 시인이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에는 정지용의 생가를 복원했다.
작품
<고향> <향수(鄕愁)> <석류> <유리창> <바다9> <비> <장수산(長壽山)> <호수> <춘설> <불사조>
시인 정지용은 『정지용시집』(1935)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조선어에 대한 세련된 감각 위에 동양 고전(古典)의 정신주의를 접목한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을 문장사(文章社)에서 발행하였다. 특히 세속과 절연된 산(山) 속을 배경으로 하여 극기와 금욕의 견인주의적(堅忍主義的) 자세를 노래한 「장수산(長壽山)」, 「인동차(忍冬茶)」나 「백록담」의 세계는 〈문장파〉의 문학적 성취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지용은 고전에의 경사(傾斜)를 주문하는 산문을 잇달아 쓰기도 하고, 자신의 뜻에 부합하는 신인들의 발굴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