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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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은 1911년 전라남도 송광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근대 불교 개혁 운동이자 종단 수호 운동이다. 이회광을 중심으로 한 원종(圓宗)이 조선 불교를 일본의 조동종(曹洞宗)에 예속시키려 하자, 한용운, 박한용 등이 이에 반대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 선맥인 '임제종(臨濟宗)'을 표방하며 자주성을 지키고자 결성하였다 이 운동은 단순한 교단 내부의 갈등을 넘어,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민족 운동과 자주화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배경

원종의 설립과 조동종 맹약

1908년경, 조선 불교계는 근대적 종단인 원종(圓宗)을 설립하고 이회광을 종정(宗正)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회광은 조선 불교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 불교 종파인 조동종과 연합을 추진했다. 1910년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맺은 7개 조의 맹약 내용이 알려지면서, 사실상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흡수·통합되는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사찰령 공포

일제는 1911년 6월 '사찰령'을 공포하여 불교 종단의 설립과 운영을 조선총독부의 허가제로 묶어두었다. 이는 조선 불교를 통제하고 관제화하려는 식민지 종교 정책의 일환이었다.

전개 및 활동

임제종의 결성

1911년 1월, 일본 조동종과의 합병을 반대하는 송광사, 화엄사, 범어사, 대흥사 등 영남과 호남 지역의 승려들이 송광사에 모여 승려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조선 불교는 신라 말 고려 초부터 전해진 임제(臨濟)의 종풍을 계승했다"고 선언하며 새로운 종단인 임제종을 창립했다.

주요 활동

  • 관구 설치: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서울(경성)에 임제종 중앙포교당(현 서울 종로구)을 설립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 정통성 수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법맥을 계승함을 강조하며, 일본 불교의 침투에 맞서 민족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 교육 및 개혁: 단순한 교단 수호를 넘어 승려 교육, 강원 개혁, 불교 청년 운동 등 근대적 개혁 운동을 병행했다.

탄압과 해체

임제종의 세력이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불온한 움직임으로 간주했다. 1912년 6월, 총독부 학무국은 원종과 임제종 양측의 대표를 소환하여 두 종단의 간판을 모두 내릴 것을 명령했다.

결국 총독부는 조선 불교의 종명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강제하고, 30본산 제도를 도입하여 각 사찰을 총독부의 직접 관리 하에 두었다. 이로써 임제종은 공식적인 종단으로서는 출범 1년여 만에 해체되었다.

의의 및 영향

임제종운동은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조기에 해체되었으나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1. 항일 불교의 시발점: 친일적인 원종과 일본 불교에 맞서 조선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최초의 조직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2. 3.1 운동으로의 계승: 이 운동을 주도했던 한용운, 백용성 등의 인물들과 그 정신은 이후 1919년 3.1 운동 당시 불교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3. 근대 불교 개혁: 전근대적인 산중 불교에서 벗어나 도심 포교와 근대적 승려 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불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