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탕개의난
개요
니탕개의 난은 1583년(선조 16년) 함경도 경원·경성 부근에서 발생한 북방 여진 세력의 무력 봉기 사건으로, 이때의 ‘니탕개는 특정한 한 개인의 실명이 아니라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여진 부족의 우두머리 또는 수괴를 지칭하는 호칭으로 이해된다. 조선 전기 북방 지역에서는 여러 여진 세력이 조선과 교역·책봉·조공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 관군이 여진 세력을 통제하거나 회유하는 방식이 자주 활용되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조선은 여진 부족 간 균형을 유지하며 국경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여진 내부의 세력 경쟁과 조선의 통제 정책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누적되어 갔다.
배경
니탕개로 불린 세력은 본래 조선과 비교적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군량·물자·우대 조치 등을 제공받는 대신 국경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하였다. 그러나 1580년대 들어 조선이 북방 방어 체계를 강화하면서 여진 부족의 무력 활동을 엄격하게 규제하자, 니탕개 세력은 자신들의 활동 범위가 제한받았다고 인식하였다. 특히 조선 관원이 여진 우두머리를 회유하거나 견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욕적 언사, 선물·보급 축소, 무역 제한 등의 조치가 불만을 크게 키웠다.
당시 함경도 지역은 가뭄과 기근이 겹쳐 여진과 조선은 모두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조선 정부는 국경 경비를 위해 호시(互市)를 통제했고, 이로 인해 여진 세력은 생계 기반을 크게 위협받았다. 니탕개 집단은 이러한 경제적 압박과 조선의 군사적 경계 강화가 자신들의 세력권을 직접 침해한다고 판단하여 반발 의지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여진 내부에서는 한계 부족들 사이에 권력 경쟁이 심화되고 있었고, 니탕개 세력은 이러한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과의 무력 충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이 겹치면서 니탕개 세력은 1583년 초 조선 북방 국경을 향해 무력 행동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국지적 침입이 아니라 조선이 유지해온 북방 지배 구조와 여진 간섭 체계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으로 이해되며, 이후 조선의 여진 정책과 후금·청으로 이어지는 만주 세력 성장의 전사(前史)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투 상황
니탕개의 난은 1583년 1월부터 7개월 남짓 지속되었다. 크게 나눠보자면 1~2월 사이에 경원부 일원에서 전개된 전쟁과 5~7월 사이에 종성부 일원에서 전개된 전쟁이라는 두 국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차 전역에서는 경원부성이 함락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북병사 이제신이 주도한 대규모의 보복성 정토가 단행되었고, 2차 전역에서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니탕개의 공세를 격퇴하였다.
경원부 일원
1583년 1월, 함경도 경원 지역에서 촉발된 일련의 여진 세력 봉기는 아산보에 속한 번호 우을지의 무력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우을지는 자신이 과거 만호였던 최몽린에게 부당한 침학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주변의 여러 번호 집단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의 호소에 반응한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회령 일대의 니탕개 집단과 종성 지역의 율보리 세력이 있었다. 우을지의 주도 아래 번호 군세는 아산보를 집중 공격해 큰 위협을 가했지만, 아산보 자체가 함락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공격의 목표는 곧바로 경원성으로 옮겨갔고, 약 1만 명에 이르는 여진 병력이 성을 포위하면서 마침내 경원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인근의 안원보 역시 이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경원성을 장악한 번호 군세는 점령을 유지하기보다는 약탈과 파괴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원성을 무너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 세력이 다시 성을 둘러싸는 장면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는 초기 포위 이후 곧바로 장기 주둔을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두 번째 포위전에서 경원성은 수비에 성공하였고, 결국 온성부사 신립이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하면서 포위는 완전히 풀렸다. 번호들은 전투 범위를 넓혀 건원보까지 공격했으나, 부령부사 장의현이 병력을 이끌고 와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 온성부사 신립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그는 아산보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안원보를 공격 중이던 번호 세력을 격파한 데 이어, 훈융진에서는 첨사 신상절과 협력해 번호의 포위망을 해체하였다. 훈융진 전투에서는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후퇴하는 번호들을 추격해 그 근거지를 무너뜨리는 공세적 전과까지 이루어냈다. 이처럼 경원진 일대의 전장은 번호 세력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조선 각 진보가 버티고 역습을 시도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신립을 비롯한 여러 장수의 지원이 전황을 되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군은 방어에만 머물지 않았다. 북병사 이제신은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해 신립, 장의현, 신상절, 그리고 군관 김우추에게 병력을 각각 나누어 맡기고 두만강 이북으로 공세 작전을 지시하였다. 조선군은 여러 번호 부락을 초토화하며 복귀했고, 이 과정에서 300여 급에 이르는 수급을 거두었다. 특히 김우추는 별동대를 이끌고 건원보 앞의 탁두 부락을 완전히 소탕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일련의 공세적 작전으로 경원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번호의 기세도 상당 부분 꺾이게 되었다.
종성부 일원
1583년 5월에 접어들면서 니탕개의 난은 새로운 단계로 확대되었다. 초기 공세를 주도했던 우을지가 중심에서 물러나고, 이번 단계에서는 니탕개와 율보리가 사실상 연합세력의 지도자로 나섰다. 이들이 규합한 회령·종성·경원·온성 일대의 번호들은 사료 기록에서 ‘2만여 기’로 표현될 만큼 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종성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면서 종성의 조선군은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음 날 온성부사 신립이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하면서 포위망은 해체되었다. 이어서 니탕개 세력은 종성뿐 아니라 주변의 동관진과 방원보까지 연속적으로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물러섰고, 결국 종성 지역을 둘러싼 일련의 전투는 조선의 방어 성공으로 귀결되었다.
종성 방어전의 결과는 단순히 조선군이 성을 지켜냈다는 의미를 넘어, 두 가지 요인의 결합이 만들어낸 승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첫 번째 요인은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의 활약이었다. 승자총통은 김지에 의해 제작된 개인 화기로, 조총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 조선군이 의존하던 주력 무기였다. 경원 전투에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상 그 위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사례는 바로 종성 전역이었다. 승자총통의 기동성과 사거리 덕분에 조선군은 성벽 위에서 보다 적극적인 화력 대응을 할 수 있었으며, 이는 포위 상황에서 큰 힘이 되었다.
두 번째 요인은 니탕개와 적대 관계에 있었던 여진 세력이 조선군과 이해를 공유하며 협조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효정’으로 기록된 번호 지도자가 니탕개의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종성이 압박받고 있던 시점에 효정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니탕개의 근거지를 기습해 타격을 가했다. 배후 거점이 파괴되자 니탕개는 더 이상 종성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웠고, 결국 군세를 회수한 뒤 두만강 이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선군의 방어 노력과 번호 내부의 분열이 맞물리면서 종성 지역은 니탕개의 대공세를 견뎌낼 수 있었다.
매체에서의 등장
- 유튜브 채널 ‘KBS역사저널 그날 ’
코미디언 김대희의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1946년생 꼰대 컨셉의 부캐. 컨텐츠 '밥묵자'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김대희는 서울특별시 태생이고, 대구에서 업무로 8년 간 머문 경험으로 사투리를 사용하다 보니 부산 사투리보다 대구 사투리에 가까우며, 에스파의 윈터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이 점을 지적했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일본은 왜 징비록에 집착했나? (KBS_2022.11.06.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