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의성 김씨 이계공파 33세손이다. 의열단,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소속되어 활발한 항일투쟁을 하였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나섰다.
생애
1912년 9월 27일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5월, 중국 난징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여 화북 지역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8월, 조선의용대 제2구대 소속으로 만주 선양으로 파견되어 선전공작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동북지역 총책이라는 지위를 숨기고 왕석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중국인 엿장수로 살았다. 하지만 1940년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이때 가까스로 탈출하여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임시 정부에 복귀했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가담해 선전 및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었을 때 이준식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소속되어 산시, 화베이지구 등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이후 유원해, 윤원장 등과 함께 임시정부요원 및 한국광복군 간부들로부터 20일에 걸친 특수 훈련을 받았다.
1944년에 만주지구공작반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백범 김구의 주선으로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19살의 여성광복군 전월순과 30살의 나이에 결혼하였다.
1944년 9월에는 선양에 도착해 김세원, 김언수, 고윤원, 안흥기 등을 포섭해 조직망을 구축하고 첩보 공작을 전개하였다. 김세원을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류허로 파견하였고 김언수, 고윤원, 안흥기 등을 국내로 침투시킴으로써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1945년 초에는 유원해를 충칭에 보냈다.
1945년 광복 직전, 한미연합작전의 한국 측 대표로 선정되었다. 미국 정보기관인 전략정보국(CIA의 전신)과 함께 한국광복군과 미군이 국내에 상륙하기 위한 OSS 작전, 일명 독수리 작전을 추진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해방 후에는 아내인 전월선 지사와 함께 국내로 돌아와 서울 마포구, 경기도 용인시 등에서 거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
1955년에서 1956년에는 한국독립당의 최고위원직을 지냈고, 1958년에는 충청남도 도지사 직무대행 서리 직책을 잠시 지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 1990년에는 전월선 지사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1992년 1월 30일 향년 80세의 나이에 노화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슬하에 7남매를 두었고 첫 아들은 김원웅이다. 김원웅은 1944년 3월 8일,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다.
관련 단체
여담
- 1940년에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이제 끝이라는 생각과 매일 일본순사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는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 생전에 첫째 아들인 김원웅에게 "남한이 친일파 청산을 못하면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며 "민족공동체의 선을 지킬 도덕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