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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FC(2025)Report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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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S22CNU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0월 20일 (월) 00:47 판 (연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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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제자백가, 사상적 춘추전국

: 근현대 중국의 개혁 사상에 대하여

(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를 중심으로)

중어중문학과 홍현성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연구목적 연구내용 연구정보 참고자원



연구배경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 제국주의 열강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은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해온 청나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1840년에 발발한 제1차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중국은 “백년국치"[1]라고 일컬어지는 치욕과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적 대혼란은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상에 있어 계몽적 대격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로 여겨지는 춘추전국시대는 유가, 법가, 도가 등 동양철학의 기초가 되는 사상들이 탄생한 제자백가의 시대였으며,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청대에는 한나라의 훈고학[2]을 복원하고자 훈고학을 계승한 고증학[3]이 성행했다. 즉,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조는 근현대 중국의 백년국치 시기에 다시금 되풀이되었다. 캉유웨이 등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사상가가 사회 개혁과 중국의 부흥을 열망하며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내놓았고, 이들의 사상은 사회 운동이나 정당 창당 등으로 이어지며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근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3인(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의 생애와 저서를 중심으로, 그들의 개혁 사상과 중국 역사에 끼친 파급력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고자 "돌아온 제자백가, 사상적 춘추전국: 근현대 중국의 개혁 사상에 대하여(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를 설정해 조사해봤다.



연구목적


우리에게 공자, 맹자, 순자 등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제자백가가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획기적인 사상을 창조해낸 것처럼, 이들 또한 근현대 중국의 시대적 혼란 극복을 위해 중국의 사상적 변화를 이끈 핵심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정보는 외국 인물이라는 한계로 인해 국내에서는 찾기 어렵고,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들도 파편적이다.

이러한 한계를 하기 위해 흩어져 있는 세 인물의 정보들을 한 데 모아 데이터화하고자 하며, 생애와 저서를 중심으로 하는 이유는 인물의 생애가 그 인물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렇게 형성된 사상은 그 인물이 쓴 저서에 담기기 때문이다.



연구정보







연구내용


캉유웨이의 생애
캉유웨이는 1858년에 광둥성 난하이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캉유웨이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고, 조부의 친구인 스승 주치기 밑에서 유학을 배웠다. 스승이 죽자 4년 동안 산에 들어가 혼자 역사를 공부했다. 학업을 다 마친 캉유웨이는 홍콩으로 갔다. 홍콩의 유럽인 거주지를 둘러보며 그곳의 질서와 행정을 경험한다. 또 선교사들이 지니고 다니던 중국어로 번역된 유럽 서적을 통해 유럽의 학문과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 후 중국 국내를 여행하며 여러 역사적 유적지를 방문했고, 1891년에는 고향 인근에서 만목초당이라는 학교를 세운다. 량치차오가 바로 이곳 만목초당에서 양성한 제자이다. 국가체제가 변형되어야 청이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캉유웨이는 여러 차례 개혁안을 써서 조정에 제출하지만 수용되지 못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1895년 뒤늦게 베이징에서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 후 1898년 6월에 외세에 경각심을 느낀 광서제를 알현한다. 그는 광서제에게 변법자강책을 제시했고 광서제는 이에 대부분 동의하였다. 100일의 개혁기간 동안 캉유웨이는 제자 량치차오 등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지만 서태후의 방해로 개혁은 실패한다. 캉유웨이는 서태후가 개혁을 가로막는다고 여겨 서태후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우지만 발각되어 도망치게 된다. 캉유웨이는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 일본, 미국 등으로 도망쳤고, 캐나다에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보황회와 제국헌정회를 조직한다. 도망자 신세였던 캉유웨이는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자 그제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해혁명을 주도한 혁명파의 공화정을 부정하였고, 공화제보다는 보수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1917년에는 청조를 재건하여 입헌군주제를 정립하기 위한 장훈복벽에 가담하지만 실패한다. 다시 해외로 도망친 그는 다음 해에 사면을 받아 다시 귀국한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급진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옛 제자들과도 결별한다. 말년에는 전통문화 보존을 위한 활동에 몰두하다가 1927년에 칭다오에서 사망한다.


캉유웨이의 저서
<신학위경고>
이 책은 캉유웨이가 공양학을 중심으로 한 금문경학의 입장에서 고문경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책이다. 고문경학은 전한시대에 발견된 <주례>, <일례>, <좌전> 등을 말하는데, 캉유웨이는 이 책들이 모두 유흠에 위해 조작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유흠이 왕망의 왕위 찬탈과 제도 개혁을 돕기 위해 이 책들을 위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문경학은 전한 때의 경학이 아닌 신나라 왕망 때 조작된 학문이기 때문에 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캉유웨이는 위조 경전이 유흠에 의해 지어지고 정현에 의해 완성되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고 보고, 이러한 위조 경전들로 인해 기존의 정치와 문화에 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공자개제고>
이 책은 캉유웨이가 공자의 제도 개혁을 실증적으로 고증한 것이다. 이 책에서 캉유웨이는 중화 문명의 총체인 유교를 창립한 공자의 위대함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더 나아가 캉유웨이는 자신을 공자에 투영함으로써 공자가 추진했던 개혁과 대동사회의 이상을 자신이 실현하고자 했다.

<대동서>
이 책에서 캉유웨이는 인간의 역사가 거란세, 승평세, 태평세의 변화를 거친다고 보고 대동사회가 곧 태평세라고 주장했다. 이상사회인 대동태평세는 모든 차별적인 경계인 구계가 사라지고, 공자가 희망한 인이 달성된 평화로운 상태라고 보았다. 캉유웨이는 전제군주제 같은 정치 체제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경계를 만들어 인민의 욕구 충족 기회를 박탈한다고 주장했다.


리다자오의 생애
리다자오는 1888년 허베이성 랴오팅현에서 태어났다. 캉유웨이와 동일하게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4세가 되면서 마을의 서원에서 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905년에 융핑 부속중학교에서 입학했고, 1907년에는 톈진으로 가서 서양 학문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총 6년간 톈진에서 머무르며 북양정법전문학교에 정치경제학과 일본어, 영어를 배웠다. 1913년에 량치차오와 함께 진보당을 창당한 탕화룽의 지원을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1916년 6월까지 일본에 머무르며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에 진학해 일본제국 헌법과 메이지 유신 등에 대해 배운다. 또한 그곳에서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미국의 초월주의, 낙관주의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에 심취한다. 귀국한 직후인 1917년에 베이징대학의 교수인 천두슈의 제안으로 베이징 대학에서 일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마오쩌둥을 베이징 대학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리다자오이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리다자오는 천두슈가 발행한 잡지 신청년에 본인의 사상을 담은 글들을 기고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자인 후스와 '문제와 주의 논쟁'을 펼친다. 후스와 달리 리다자오는 사회구조적 근본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고 급진적 혁명을 주장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리다자오는 본인이 일하는 베이징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조직하고 자신과 사상을 함께할 많은 인물을 양성한다. 이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중국 공산당 창당에 대해 논의하고, 공산당의 기틀이 되는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마침내 1921년 7월에 천두슈, 마오쩌둥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군벌들이 난립하던 상황이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리다자오는 국민당과의 협상을 통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쑨원 사후 1927년에 장제스가 반공 쿠데타인 4.12 쿠데타를 통해 공산당원들을 축출함으로써 합작이 와해되고 제1차 국공내전이 발생한다. 이후 리다자오는 1927년에 봉천군벌의 지도자인 장쭤린에 의해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참고자원


<현대 중국 철학사> 펑유란 지음, 정인재 옮김 / 이제이북스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조경란 지음 / 책세상

<처음 읽는 중국 현대 철학> 중국현대철학연구회 지음 / 동녘

<중국 근대 철학사> Alfred Forke 지음, 최해숙 옮김 / 예문서원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종합DB

위키백과


주석


  1. 제1차 아편전쟁(1839년/1840년)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
  2.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소실된 유교 경전을 연구하고 해석한 학문
  3. 본래는 만주족의 통치에 반발한 한족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됐으나, 문자의 옥을 거치며 점차 반만의식이 소멸되었고 실증적인 부분만 남아 발전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