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FC(2025)Report03
CNUDH
: 근현대 중국의 개혁 사상에 대하여
(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를 중심으로)
중어중문학과 홍현성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 제국주의 열강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은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해온 청나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1840년에 발발한 제1차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중국은 “백년국치"[1]라고 일컬어지는 치욕과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적 대혼란은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상에 있어 계몽적 대격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로 여겨지는 춘추전국시대는 유가, 법가, 도가 등 동양철학의 기초가 되는 사상들이 탄생한 제자백가의 시대였으며,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청대에는 한나라의 훈고학[2]을 복원하고자 훈고학을 계승한 고증학[3]이 성행했다. 즉,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조는 근현대 중국의 백년국치 시기에 다시금 되풀이되었다. 캉유웨이 등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사상가가 사회 개혁과 중국의 부흥을 열망하며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내놓았고, 이들의 사상은 사회 운동이나 정당 창당 등으로 이어지며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근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3인(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의 생애와 저서를 중심으로, 그들의 개혁 사상과 중국 역사에 끼친 파급력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고자 "돌아온 제자백가, 사상적 춘추전국: 근현대 중국의 개혁 사상에 대하여(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를 설정해 조사해봤다.
연구목적
우리에게 공자, 맹자, 순자 등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캉유웨이, 리다자오, 후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제자백가가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획기적인 사상을 창조해낸 것처럼, 이들 또한 근현대 중국의 시대적 혼란 극복을 위해 중국의 사상적 변화를 이끈 핵심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정보는 외국 인물이라는 한계로 인해 국내에서는 찾기 어렵고,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들도 파편적이다.
이러한 한계를 하기 위해 흩어져 있는 세 인물의 정보들을 한 데 모아 데이터화하고자 하며, 생애와 저서를 중심으로 하는 이유는 인물의 생애가 그 인물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렇게 형성된 사상은 그 인물이 쓴 저서에 담기기 때문이다.
연구정보
노드 190개, 링크 255개 -> 주제 특정상 세 인물의 생애를 총망라하고 사상까지 다루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많음 -> 다만 더 체계적으로 다듬으면 충분히 줄일 수 있음
연구내용
캉유웨이의 생애
캉유웨이는 1858년에 광둥성 난하이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캉유웨이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고, 조부의 친구인 스승 주치기 밑에서 유학을 배웠다. 스승이 죽자 4년 동안 산에 들어가 혼자 역사를 공부했다. 학업을 다 마친 캉유웨이는 홍콩으로 갔다. 홍콩의 유럽인 거주지를 둘러보며 그곳의 질서와 행정을 경험한다. 또 선교사들이 지니고 다니던 중국어로 번역된 유럽 서적을 통해 유럽의 학문과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 후 중국 국내를 여행하며 여러 역사적 유적지를 방문했고, 1891년에는 고향 인근에서 만목초당이라는 학교를 세운다. 량치차오가 바로 이곳 만목초당에서 양성한 제자이다. 국가체제가 변형되어야 청이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캉유웨이는 여러 차례 개혁안을 써서 조정에 제출하지만 수용되지 못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1895년 뒤늦게 베이징에서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 후 1898년 6월에 외세에 경각심을 느낀 광서제를 알현한다. 그는 광서제에게 변법자강책을 제시했고 광서제는 이에 대부분 동의하였다. 100일의 개혁기간 동안 캉유웨이는 제자 량치차오 등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지만 서태후의 방해로 개혁은 실패한다. 캉유웨이는 서태후가 개혁을 가로막는다고 여겨 서태후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우지만 발각되어 도망치게 된다. 캉유웨이는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 일본, 미국 등으로 도망쳤고, 캐나다에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보황회와 제국헌정회를 조직한다. 도망자 신세였던 캉유웨이는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자 그제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해혁명을 주도한 혁명파의 공화정을 부정하였고, 공화제보다는 보수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1917년에는 청조를 재건하여 입헌군주제를 정립하기 위한 장훈복벽에 가담하지만 실패한다. 다시 해외로 도망친 그는 다음 해에 사면을 받아 다시 귀국한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급진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옛 제자들과도 결별한다. 말년에는 전통문화 보존을 위한 활동에 몰두하다가 1927년에 칭다오에서 사망한다.
캉유웨이의 저서
<신학위경고>
이 책은 캉유웨이가 공양학을 중심으로 한 금문경학의 입장에서 고문경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책이다. 고문경학은 전한시대에 발견된 <주례>, <일례>, <좌전> 등을 말하는데, 캉유웨이는 이 책들이 모두 유흠에 위해 조작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유흠이 왕망의 왕위 찬탈과 제도 개혁을 돕기 위해 이 책들을 위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문경학은 전한 때의 경학이 아닌 신나라 왕망 때 조작된 학문이기 때문에 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캉유웨이는 위조 경전이 유흠에 의해 지어지고 정현에 의해 완성되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고 보고, 이러한 위조 경전들로 인해 기존의 정치와 문화에 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공자개제고>
이 책은 캉유웨이가 공자의 제도 개혁을 실증적으로 고증한 것이다. 이 책에서 캉유웨이는 중화 문명의 총체인 유교를 창립한 공자의 위대함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더 나아가 캉유웨이는 자신을 공자에 투영함으로써 공자가 추진했던 개혁과 대동사회의 이상을 자신이 실현하고자 했다.
<대동서>
이 책에서 캉유웨이는 인간의 역사가 거란세, 승평세, 태평세의 변화를 거친다고 보고 대동사회가 곧 태평세라고 주장했다. 이상사회인 대동태평세는 모든 차별적인 경계인 구계가 사라지고, 공자가 희망한 인이 달성된 평화로운 상태라고 보았다. 캉유웨이는 전제군주제 같은 정치 체제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경계를 만들어 인민의 욕구 충족 기회를 박탈한다고 주장했다.
리다자오의 생애
리다자오는 1889년 허베이성 랴오팅현에서 태어났다. 캉유웨이와 동일하게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4세가 되면서 마을의 서원에서 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905년에 융핑 부속중학교에 입학했고, 1907년에는 톈진으로 가서 서양 학문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총 6년간 톈진에서 머무르며 북양정법전문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일본어, 영어를 배웠다. 1913년에 량치차오와 함께 진보당을 창당한 탕화룽의 지원을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1916년 6월까지 일본에 머무르며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에 진학해 일본제국 헌법과 메이지 유신 등에 대해 배운다. 또한 그곳에서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미국의 초월주의, 낙관주의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에 심취한다. 귀국한 직후인 1917년에 베이징대학의 교수인 천두슈의 제안으로 베이징 대학에서 일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마오쩌둥을 베이징 대학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리다자오이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리다자오는 천두슈가 발행한 잡지 신청년에 본인의 사상을 담은 글들을 기고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자인 후스와 '문제와 주의 논쟁'을 펼친다. 후스와 달리 리다자오는 사회구조를 우선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보고 급진적 혁명을 주장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리다자오는 본인이 일하는 베이징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조직하고 자신과 사상을 함께할 많은 인물을 양성한다. 이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중국 공산당 창당에 대해 논의하고, 공산당의 기틀이 되는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마침내 1921년 7월에 천두슈, 마오쩌둥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군벌들이 난립하던 상황이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리다자오는 국민당과의 협상을 통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쑨원 사후 1927년에 장제스가 반공 쿠데타인 4.12 쿠데타를 통해 공산당원들을 축출함으로써 합작이 와해되고 제1차 국공내전이 발생한다. 이후 제국주의와 군벌에 반대하던 리다자오는 봉천군벌의 지도자인 장쭤린에 의해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1927년 4월 28일에 처형당한다.
리다자오의 저서
<나의 마르크스주의관>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가 아직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함과 동시에 본인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중국에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요소인 변증법적 유물론,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등을 소개했다. 후에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중국의 상황에 맞도록 과감하게 재해석해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를 단순 계급이 아닌 중국 민족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즉, 계급투쟁의 범위를 국내에서 국외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현재 중국이 군벌의 난립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낙후됐다고 보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청년과 노인>
이 책 리다자오가 사회의 진화를 위해서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책이다. 책의 제목인 청년은 진보주의를, 노인은 보수주의를 상징한다. 이 책을 통해 전통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천두슈에 비해 리다자오가 유연하고 온건적인 전통관을 지녔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연한 전통관을 토대로 전통 사상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를 마르크스주의에 적용시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식으로 전유하고자 한 것이다.
<민이와 정치>
제목의 '민이'는 '백성의 떳떳함'이라는 뜻이다. 리다자오는 이 책에서 민이는 아무리 억압하려고 해도 절대로 억압할 수 없으며 계속해서 역사를 창조해낸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체적이고 낙관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문제와 주의를 재론하다>
이 글은 잡지 신청년에 후스가 기고한 글 <보다많이 문제를 연구하고, 적게 주의를 말하라>에 대한 반박의 차원에서 리다자오가 저술한 것이다. 글의 제목에서 '문제'는 사회 개별 문제를 의미하고, '주의'는 사회의 사상이나 구조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 리다자오는 사회구조의 변혁 없이는 사회의 진화가 있을 수 없다며 사회구조의 우선적인 변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구조 변혁의 수단으로 개량적 개혁이 아닌 급진적 혁명을 주장하였다.
후스의 생애
후스는 1891년에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 가숙을 한 그는 1904년에 처음으로 근대 교육을 받았다. 1910년에는 의화단 배상금으로 운영되는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코넬대 농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1912년에 철학과로 전과한다. 1915년에는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실용주의 철학자였던 존 듀이에게 철학을 배웠다. 실용주의와 더불어 세상의 모든 관념과 사상은 현실 개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도구주의를 주장한 존 듀이의 사상은 후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1917년에 귀국한 후스는 천두슈가 발행한 잡지 신청년에 글을 기고하며 합류했고, 같은 해에 베이징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19년에는 중국을 방문한 본인의 스승 존 듀이와 함께 중국 전역을 돌며 강연을 통역한다. 잡지 신청년에 자신의 사상을 담은 글을 기고하며 적극적으로 신문화 운동에 참여한 그는 리다자오와 '문제와 주의 논쟁'을 벌인다. 사회구조의 우선적 변혁을 주장한 리다자오와 달리 후스는 개별 문제에 대한 연구가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항상 정론지와 함께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상이었다. 후스는 '혁명 대신 개량', '주의보다 개별 문제의 연구', '서구적인 법치와 대의제'로 대표되는 본인의 사상을 시종일관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입장은 중국공산당은 물론이고 본인이 속해있던 중국국민당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오죽하면 후스는 1920년대 말 30년대 초에 잡지 '신월'을 중심으로 우상화되어 성역화되던 쑨원을 비판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그래프를 통해 나타낸 1920년대 말 30년대 초까지의 후스의 생애]]] 후스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중화민국의 미국대사를 지냈으며, 2차 대전 종전 이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제스의 국민당과 함께 대만섬으로 이동한다. 후에 그는 대만에서 외교부장, 중앙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2년 사망할 때까지 대만에서 잡지 '문성'을 통해 자유주의 운동을 벌였다.
후스의 저서
<문학 개량 추이>
이 책에서 후스는 사대부가 사용하는 고전문체를 비판함과 동시에 일반 대중에게 익숙하고 배우기도 쉬운 백화문(구어) 운동을 주장한다. 이러한 후스의 주장은 미국 유학 당시에 본인의 교수였던 존 듀이의 사상에 후스가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존 듀이와 마찬가지로 후스는 실용적인 교육을 중시하였다.
<보다많이 문제를 연구하고, 적게 주의를 말하라>
앞서 언급한 리다자오의 저서 <문제와 주의를 재론하다>와 함께 '문제와 주의 논쟁'의 중심에 있던 글로, 리다자오의 도구주의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혁명을 통한 사회구조 우선 변혁을 주장한 리다자오와 달리 도구론적 실용주의자였던 후스는 사회 개별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혁명이 아닌 개량적 개혁이 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자원
<현대 중국 철학사> 펑유란 지음, 정인재 옮김 / 이제이북스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조경란 지음 / 책세상
<처음 읽는 중국 현대 철학> 중국현대철학연구회 지음 / 동녘
<중국 근대 철학사> Alfred Forke 지음, 최해숙 옮김 / 예문서원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종합DB
위키백과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