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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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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background:#ffcccc"><font size="5">1) 출생</font></span> <font size="4">왕유(王維, 699년 ~ 759년)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왕유의 아버지는 분주사마(汾州司馬)를 지내고 하동(河東)으로 이주한 왕처렴(王処廉)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북종선(北宗禪) 제2조(祖) 보적(普寂)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던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 왕유도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라났다. 왕유의 자인 마힐(摩詰)도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font><p>
 
<span style="background:#ffcccc"><font size="5">1) 출생</font></span> <font size="4">왕유(王維, 699년 ~ 759년)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왕유의 아버지는 분주사마(汾州司馬)를 지내고 하동(河東)으로 이주한 왕처렴(王処廉)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북종선(北宗禪) 제2조(祖) 보적(普寂)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던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 왕유도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라났다. 왕유의 자인 마힐(摩詰)도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font><p>
 
<span style="background:#ffcccc"><font size="5">2) 관직</font></span> <font size="4">'''개원 7년(719년)''' 왕유는 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개원 8년(720년)''' 작은 죄가 문제가 되어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span>으로 좌천당했다. '''개원 14년(726년)''' 무렵 왕유는 관직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개원 19년(731년)''' 무렵 아내가 죽자 왕유는 망천(輞川)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장구령의 발탁으로 '''개원 22년(734년)''' 왕유는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우습유(右拾遺)</span> 관직을 받았다. 개원 24년(736년) 장구령이 귀족 파벌의 이임보(李林甫)와의 정쟁에서 패해 실각하고, 왕유 자신도 '''개원 25년(737년)''' 양주(涼州)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span style="background:Lavender">감찰어사(監察御史)</span>로 승진하였다. '''개원 28년(740년)'''에는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span>로써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곧 다시 남방으로 파견되었다. '''천보 14재(755년)'''에는 <span style="background:Lavender">급사중(給事中)</span>이라는 요직이 되었다.</font><p>
 
<span style="background:#ffcccc"><font size="5">2) 관직</font></span> <font size="4">'''개원 7년(719년)''' 왕유는 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개원 8년(720년)''' 작은 죄가 문제가 되어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span>으로 좌천당했다. '''개원 14년(726년)''' 무렵 왕유는 관직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개원 19년(731년)''' 무렵 아내가 죽자 왕유는 망천(輞川)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장구령의 발탁으로 '''개원 22년(734년)''' 왕유는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우습유(右拾遺)</span> 관직을 받았다. 개원 24년(736년) 장구령이 귀족 파벌의 이임보(李林甫)와의 정쟁에서 패해 실각하고, 왕유 자신도 '''개원 25년(737년)''' 양주(涼州)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span style="background:Lavender">감찰어사(監察御史)</span>로 승진하였다. '''개원 28년(740년)'''에는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span>로써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곧 다시 남방으로 파견되었다. '''천보 14재(755년)'''에는 <span style="background:Lavender">급사중(給事中)</span>이라는 요직이 되었다.</font><p>
<span style="background:#ffcccc"><font size="5">3) 사망</font></span> <font size="4">왕유는 승려로써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무렵 두보(杜甫)에게 격려의 시를 보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집현학사(集賢学士)로 승진하였다. 그 해에 다시 중서사인(中書舎人)에 이어 급사중(給事中)으로 누차 진급하였다. 이 무렵 두보나 가지(賈至)、잠삼(岑参)과 함께 시를 주고 받으며 살았다. 상원(上元) 2년(762년) 상서우승(尚書右丞)이 되었다. 그 해에 기근이 들자 '''왕유는 자신의 직전(職田)에서 나는 곡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베풀자고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자신의 은퇴를 청하면서 촉주자사(蜀州刺史)로 있던 왕진을 자신 대신 중앙으로 불러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span>가 그것이다. 왕진은 이 표문으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으나, 왕유는 그 해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무렵 왕유는 봉상(鳳翔)에 있던 동생 진이나 다른 벗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쓴 다음, 붓을 내려 놓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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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background:#ffcccc"><font size="5">3) 사망</font></span> <font size="4">왕유는 승려로써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무렵 두보(杜甫)에게 격려의 시를 보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집현학사(集賢学士)로 승진하였다. 그 해에 다시 중서사인(中書舎人)에 이어 급사중(給事中)으로 누차 진급하였다. 이 무렵 두보나 가지(賈至)、잠삼(岑参)과 함께 시를 주고 받으며 살았다. 상원(上元) 2년(762년) 상서우승(尚書右丞)이 되었다. 그 해에 기근이 들자 '''왕유는 자신의 직전(職田)에서 나는 곡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베풀자고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자신의 은퇴를 청하면서 촉주자사(蜀州刺史)로 있던 왕진을 자신 대신 중앙으로 불러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span style="background:Lavender">「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span>가 그것이다. 왕진은 이 표문으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으나, 왕유는 그 해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무렵 왕유는 봉상(鳳翔)에 있던 동생 진이나 다른 벗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쓴 다음, 붓을 내려 놓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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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6">'''2. 작품 분석'''</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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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0일 (일) 16: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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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维的画中游

중어중문학과 황현성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연구목적 연구내용 참고자원



연구배경


Wangwei.jpg

중국시가 수업에서 성당(盛唐)시기의 시인 '왕유(王維, 701~761)'라는 인물의 시를 배우게 되었다. 주요 관직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유와 생애가 궁금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러한 진부한 이유 뿐만이 아닌 서예, 음악, 그림 등 다방면에 능한 모습이 충분히 나의 이목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라고 평을 받는 만큼 그의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느낌이 들어 그의 그림은 시를 연상시키는 그림인지 궁금해졌다.




연구목적


1) 왕유의 생애 - 작품을 분석하려면 작가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한다.

2) 작품의 분석 - 왕유의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사상과 화풍을 분석한다.

3) 작가 평가 - 화가로써의 왕유의 평가와 그의 작품의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연구내용


1. 생애

1) 출생 왕유(王維, 699년 ~ 759년)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왕유의 아버지는 분주사마(汾州司馬)를 지내고 하동(河東)으로 이주한 왕처렴(王処廉)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북종선(北宗禪) 제2조(祖) 보적(普寂)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던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 왕유도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라났다. 왕유의 자인 마힐(摩詰)도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 관직 개원 7년(719년) 왕유는 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개원 8년(720년) 작은 죄가 문제가 되어 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으로 좌천당했다. 개원 14년(726년) 무렵 왕유는 관직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개원 19년(731년) 무렵 아내가 죽자 왕유는 망천(輞川)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장구령의 발탁으로 개원 22년(734년) 왕유는 우습유(右拾遺) 관직을 받았다. 개원 24년(736년) 장구령이 귀족 파벌의 이임보(李林甫)와의 정쟁에서 패해 실각하고, 왕유 자신도 개원 25년(737년) 양주(涼州)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 개원 28년(740년)에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써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곧 다시 남방으로 파견되었다. 천보 14재(755년)에는 급사중(給事中)이라는 요직이 되었다.

3) 사망 왕유는 승려로써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무렵 두보(杜甫)에게 격려의 시를 보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집현학사(集賢学士)로 승진하였다. 그 해에 다시 중서사인(中書舎人)에 이어 급사중(給事中)으로 누차 진급하였다. 이 무렵 두보나 가지(賈至)、잠삼(岑参)과 함께 시를 주고 받으며 살았다. 상원(上元) 2년(762년) 상서우승(尚書右丞)이 되었다. 그 해에 기근이 들자 왕유는 자신의 직전(職田)에서 나는 곡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베풀자고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자신의 은퇴를 청하면서 촉주자사(蜀州刺史)로 있던 왕진을 자신 대신 중앙으로 불러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가 그것이다. 왕진은 이 표문으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으나, 왕유는 그 해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무렵 왕유는 봉상(鳳翔)에 있던 동생 진이나 다른 벗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쓴 다음, 붓을 내려 놓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2. 작품 분석




참고자원


(자유롭게 서술)


Foot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