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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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무덕 원년))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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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을 따라 낙양을 평정. 상복으로 승진하여 어가를 받들면서, 그는 여섯 가지 제왕 공후가 입는 옷과 예복, 가마, 모두 우아하고 예의에 맞는 규정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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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을 따라 낙양을 평정하고 상의봉어(尙衣奉御)에 올랐다. 정관 연간에 소장(少將)과 대장(大將)을 역임하였고, 당 고조(高祖)의 헌릉(献陵)을 조성하고, 취미(翠微)와 옥화(玉華)의 두 궁을 감독하고, 소릉(昭陵)을 건설하고, 장안성 외곽과 성루를 축조하는 등 공예와 그림에 조예가 깊어 공부의 상서(尙書)를 누천했다.<ref>360Doc, "阎立德", http://www.360doc.com/content/24/0217/16/99076_1114307229.shtml#google_vignett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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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8일 (월) 15:41 판

중국의역사와인물(강의) 페이지로 가기



염립덕(閻立德)

: 인물에 관한 압축적 표현

중어중문학과 박지연





목차

Contents


개요 생애 연보 데이터 참고문헌 주석



개요


여기에 자유롭게 서술.-간단하게 정리, 초점을 잡고 정리할 내용 간단하게 정리 4~5줄 넘지 않게 서술.

염립덕의 대표작품을 찾아 정리하다. 그 중에서도 정관 23년(649)년에 완공된 자오링 묘에 대해서 분석할 것임.



생애


특징적 항목1


(해당 항목의 정보 서술)

특징적 항목2


(해당 항목의 정보 서술)



연보


596


출생[1]

618(무덕 원년)


진왕의 궁궐에서 학자로 지내며 군대에 입대하였다. [2]

621년(무덕 4년)


이세민을 따라 낙양을 평정하고 상의봉어(尙衣奉御)에 올랐다. 정관 연간에 소장(少將)과 대장(大將)을 역임하였고, 당 고조(高祖)의 헌릉(献陵)을 조성하고, 취미(翠微)와 옥화(玉華)의 두 궁을 감독하고, 소릉(昭陵)을 건설하고, 장안성 외곽과 성루를 축조하는 등 공예와 그림에 조예가 깊어 공부의 상서(尙書)를 누천했다.[3]

627(정관 원년)


소장이 되고 대안현남(大安縣男)에 봉해졌다.

629(정관 3년)


동만사원(東蛮谢元)이 장안(長安)으로 깊숙이 순례하여 염립덕(阎立德)이 조서를 받들어 '왕회도(王會圖)'를 기려 당제국의 강대한 융성과 먼 민족과의 우호관계를 노래했다. 또한 '문성공주 강번도(文成公主 降番圖)'를 그려 정관 15년 태종이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보내 송찬간포와 혼인을 맺게 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 작품들은 전해지지 않는다.[4]

634(정관 8년)


당 태종의 아버지 이연(李淵)의 명을 받아 장안성 동북쪽에 임시 피서지로 하궁인 영안궁(永安宮)을 지었다.

635(정관 9년)


이연이 승하하자 당 태종 이세민은 염립덕에게 소릉(昭陵) 건립을 전담시켰다.

636(정관 10년) 6월


문덕황후가 죽은 후, 태종은 염립덕에게 소릉(昭陵) 건설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건설 진척이 느리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소릉(昭陵)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자 태종은 그를 박주자사로 승진시켰다. 태종은 낙양(洛陽)에 살면서 그에게 이화원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그는 여주의 서쪽 산간지역을 선택하여 정관 14년 8월에 향성궁을 지었고, 막대한 돈을 들여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했으며, 날씨가 더워서 사람이 살 수 없었다. 태종은 화가 나서 그를 면직시켰다.[5]

640(정관 14년)


당 태종은 낙양을 순행하여 염리덕을 불러 지대가 높고 건조하며 시원한 곳을 골라 이궁을 지어 더위를 식히라고 하였다.
염립덕은 여주 임여현(지금의 허난 여양현) 서산영(西山營)에 양성궁(襄城宮, 청서궁)을 지었다. 궁전은 여수 위에 지어졌고 광청쩌를 향하여 100만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다


641년 3월(정관 15년)


당 태종은 양성궁을 순행하다가, 현지의 날씨가 무덥고 독사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양성궁을 폐관하고, 염립덕도 파직되었다.

644(정관 18년)


태종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낼 준비를 하고 홍주(지금의 강서성 난창), 소주(현재 강서성 포양), 강주(현재 강서성 주장)에 400척의 거대 배를 건조하라고 명령했다. ). 군사 식량을 운송합니다. 이듬해 태종 이세민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그를 궁궐 감독으로 삼아 원정에 동행했다. 전쟁이 끝나고 당군이 남쪽으로 돌아오자 요하(遼河) 지역에 이르러 약 200리의 늪지대를 만나서 사람과 말이 통행하기 어려웠다. 그는 병사들에게 늪을 흙으로 채워 부교를 만들어 군대가 원활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지시했습니다.[6]

647(정관 21년)


4월
중남산에 취위궁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이듬해 초에 의준(지금의 산시성 이준현)에 옥화궁을 건축하였다.[7]

7월
당 태종은 염립덕에게 명하여 의주 의군현 봉황곡 고조가 세운 인지궁을 기초로 옥화궁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건립의 공로로 당 태종(唐太宗)에 의해 공부상서(工部尙書)에 봉해졌다.


649(정관 23년)


당 태종이 승하하자 능사(陵事)를 주관하여 대안현공(大安縣公)에 봉해졌다. [8]

654(영휘 5년) 3월[9]


그는 4만 명의 인부를 거느리고 장안성 성문을 보수하였는데, 과로로 인해 조정에서 그에게 이부상서(吏部尙書)와 병주도독(并州都督)을 추증하여 소릉(昭陵)에 모실 수 있도록 하였다.[10]

656(현경 원년) 3월


사망[11]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추후 임베딩)

Digital Atlas


(추후 임베딩)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서술)

온라인 리소스


(서술)- 링크부여할 것,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도 함께 달기/논문 포함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