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 dynasty
CNU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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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
618-712년, 初唐, Early Tang
→ 고조(高祖)에 의한 당나라 건국부터 예종(睿宗)의 태극太極 원년까지의 시기.
| 기간(연도) | 역사적 사건 | 관련 인물 |
|---|---|---|
| 618년 | 당나라 건국: 수나라의 멸망 | 고조(高祖) |
| 626년 |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 황제 자리를 노린 진왕 이세민의 정변 | 황태자 이건성(李建成), 고조의 4왕자 이원길(李元吉), 태종(太宗) |
| 627-649년 | 정관의 치(貞觀之治): 태종 이세민 시기의 태평성대 *정관정요(貞觀政要) |
태종(太宗 ), 문덕황후(文德順聖皇后), 능연각(凌煙閣) 24공신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장손무기(長孫無忌), 울지공(尉遲恭), 이정(李靖), 유홍기(劉弘基), 우세남(虞世南), 유정회(劉政會), 공영달(孔穎達), 손사막(孫思邈) |
| 627-645년 | 현장의 서행: 삼장법사 현장(玄奘)의 인도여행 | 현장(玄奘) |
| 629-641년 | 이민족 정벌 동돌궐(東突厥) 정벌(629~630년), 토욕혼(吐谷渾) 정벌(634~635년) 고창(高昌.투루판) 정벌(639년), 설연타(薛延陀) 정벌(641년).정복(646년) |
이세적(李世勣), 이도종(李道宗), 후군집(侯君集) |
| 645-668년 | 고구려-당 전쟁: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 태종(太宗), 이세적(李世勣), 이도종(李道宗) |
| 670-676년 | 나당 전쟁: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 고종(高宗), 설인귀(薛仁貴) |
| 690-705년 | 무주(武周) 건국: 측천무후의 주周 건국[1] | 측천무후(則天皇后), 적인걸(狄仁杰), 서유공(徐有功), 소미도(蘇味道) |
| 710년 | 당륭정변(唐隆政變) | 예종(高宗), 현종(玄宗), 위황후(韋皇后), 안락공주(安樂公主), 태평공주(太平公主) |
초당初唐의 문학사적 특징:
초당初唐 시기에는 남북조의 문학풍조를 이어받아 대체로 형식미를 존숭하는 유미주의唯美主義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따라서 초당에는 제齊, 양梁의 여풍을 계승한 궁정宮廷 문학이 성행하였고〔태종 때 양梁, 진陳의 궁체시를 계승하여 화려한 형식으로 황제의 공을 노래하고 덕을 칭송하는 시를 창작하게 함으로써 궁정시인들의 시풍이 초당 시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당시 아름답고 화려한 형식의 작품을 지었던 대표적 인물이 상관의(上官儀).〕, 이들의 형식미와 성률의 추구는 초당사걸(初唐四傑):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유미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시풍을 전개한 4명의 인물. 인생이 모두 불행했다. 왕발은 나이 30도 못되어 물에 빠져 죽었고, 노조린은 병고에 시달리다 40세 전후에 물에 투신하였고, 낙빈왕도 30여 세에 정치활동에 실패하여 도망쳐 없어져 버렸고, 양형만이 무난히 살았으나 그도 40여 세에 죽었다.〕을 거쳐서 마침내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심전기는 7언시에, 송지문은 5언시에 뛰어났다.〕에 이르러 근체시近體詩를 이룩케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왕적(王績), 왕범지(王梵志) 같은 개성적인 작가들이 나오고〔왕적과 왕범지는 모두 자유롭게 살았다.〕 다시 진자앙(陳子昻)처럼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건안풍골(建安風骨)을 내세움으로써 성당의 번영을 준비하는 작가도 나온다. 산문은 변려문騈儷文이 더욱 성행하는데 문장의 구절이 4언, 6언으로 더욱 규식화하여 흔히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부르게 된다.[2]
713-755년, 盛唐, High Tang
→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원년에서 천보天寶 말년까지의 시기.
| 기간(연도) | 역사적 사건 | 관련 인물 |
|---|---|---|
| 713-741년 | 개원의 치(開元之治): 당 현종의 치세 | 현종(玄宗), 요숭(姚崇), 한휴(韓休), 송경(宋璟), 장구령(張九齢) 일행(一行) |
| 751년 | 탈라스 전투: 이슬람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 사이의 전투 *경행기(經行記) |
고선지(高仙芝), 두환(杜環) |
| 750-755년 | 당 현종과 양귀비 | 현종(玄宗), 양귀비(楊貴妃), 고력사(高力士), 양국충(楊國忠) |
| 755-763년 | 안사의 난(安史之亂):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 *번진(藩鎭) 세력의 대두 |
안록산(安祿山), 사사명(史思明), 장개연(張介然), 가서한(哥舒翰) |
안사의 난이 불러온 사회적 변화:
당나라가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그 이후를 '중세시대'로 만든 큰 변화를 아래에 요약하려 한다.
첫째, 상공업의 발달과 소시민층의 형성이다. 당나라 초기의 농업 생산과 경제상의 안정에 따라 각종 수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또 수륙 교통의 발전과 함께 상업도 크게 성하여, 개원開元 연간에는 당나라와 통상하는 나라가 40여 국이나 되고 장안 한 도시에만도 외국인의 상점이 4,000여개나 있었다 한다. '안사의 난' 이후 북방은 연이은 전란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남방은 안정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영하였다. 양주揚州 같은 도시는 국제적인 시장으로 발전하였고, 항주杭州에는 10여 만호가 모여 살았다. 따라서 이런 도시에 생겨난 큰 공장주.부상富商.도시상인.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이른바 시민 계층을 형성하게 되어, 새로운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문학면에 있어서는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문학 전반에 걸친 개혁운동이 일어나, 전기소설傳奇小說, 사詞, 변문變文, 고문운동古文運動, 신악부新樂府 등이 생겨났다.
둘째, 외국 문화의 도입이다. 당나라는 처음부터 국토 개척의 정책을 써서 사방 여러 나라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판도를 넓히고 변경을 안정시켰다. 그 결과 그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고, 전쟁을 통하여 개척된 외국과의 교통망을 이용하여 세계 여러 나라와 문화적 경제적 교루를 갖게 되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역과 유럽 일부의 나라와도 교역이 있게 되었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더 많은 외국문화가 들어온다. 그 결과 서역과 인도 등지의 문화가 대량 수입되어, 당나라 음약.무용.회화와 문학 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다. 지금 돈황을 비롯하여 중국 각지의 석굴에 보전되어 있는 조각과 벽화 등은 인도 문화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결정이며, 문학에 있어서도 변문은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안사의 난' 때 반란군의 주력이 이민족의 군대였고, 또 당나라 조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이에 반란군뿐만이 아니라 진압군의 외국 군대들도 백성들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멋대로 하였다. 그 결과 반란이 평정된 뒤에도 외국세력의 당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고, 외국문화의 영향도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셋째, 과거제도의 확립과 학교 교육의 발달 및 중하층 지식분자들의 대두이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과거제도를 확립시켰다. 현종 때에 이르러 과거의 내용과 형식이 명경明經.진사進士의 두 과로 확정되었는데, 이전부터도 당나라에서는 시부詩賦로 시험을 치르는 진사과進士科를 중시하는 습성이 있어 문학을 크게 발달케 하였다. 특히 '안사의 난' 이후로는 많은 하층의 지식분자들이 과거를 통하여 고급 관료로 출세하여 새로운 사회세력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 발전을 위하여도 신선하고 적극적인 역량이 되어, 새로운 시가와 산문, 전기소설 등을 발전케 하였다. 당대에는 학교 교육도 매우 발달하여, 장안에는 국학國學이 있고, 지방에도 각기 부府.주州.현학縣學이 있었으며, 사학私學도 성행하였다. 이것도 지식층의 확대를 통하여 당대문화를 발전시키고 문학을 성행케 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넷째, 각종 예술과 종교의 발전이다. 당대에는 외국음악의 영향 아래 음악이 크게 발전하여 수隋대의 구부악九部樂을 계승한 十部伎가 연주되었다. '십부기'란 곧 연악.청상.서량.부남.고려.구자.안국.소륵.강국.고창의 열 가지 음악이다. 그리고 현종 때에는 음악 기관인 교방敎坊이 더욱 확장되어, 여러 가지 음악과 춤이 연주되고 연출되었다. 그리고 남북조를 이어 대면.발두.참군희 등 여러 가지 가무희歌舞戱가 각지에 유행하였다. 이것들은 시가의 발전과 직접 관계가 깊으며, 후세 강창講唱 등의 민간 연예 및 소설.희곡 발달에도 기여하게 된다. 미술도 크게 발전하여 화성畵聖이라 일컬어지는 오도자吳道子와 중국 산수화의 경지를 높여준 이사훈李思訓, 왕유王維 등이 나왔다. 그 밖에 돈황의 천불동千佛洞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과 유물로 보아 건축과 조각 기술도 굉장히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는 다른 왕조들이나 마찬가지로 유교가 정치.사회의 기본 윤리를 이루었으나, 도교도 국교처럼 존중되어, 노자는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봉해지고, 『노자』와 『장자』, 『문자』, 『열자』 등은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불교도 극성하여 한 때 현장玄奘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의 인도 불경의 번역 작업이 진행되었고 많은 불교 유적을 남겼다. 그 밖에 외국의 종교인 경교景敎(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 요교祅敎(조로아스터교), 마니교摩尼敎, 회교回敎(이슬람교) 등도 외국 세력을 따라 들어와 유행하였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로운 성행과 다양화는 당대 사상의 폭을 넓혀 갖가지 문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3]
성당盛唐의 문학사적 특징:
성당盛唐은 당제국의 경제와 문화가 고도로 발달했던 시기이며, 중국시도 큰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이다. 이제까지 닦아온 시의 형식적인 아름다움의 표현기교에다가 다양한 사상과 내용을 담아 보다 높은 수준의 시를 생산한 것이다. 아름다운 수사와 극도로 발달한 형식에다 풍족한 생활과 안락한 삶에서 우러나온 사상 감정을 실었기 때문에, 시가 큰 발전을 이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심지어 중국시는 당시가 대표하고, 당시는 다시 '성당시'가 대표한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성당 초기 개성적인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성당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들로, 장구령張九齡, 하지장賀知章, 장열張說, 소정蘇頲 등이 있다. 그리고 개원.천보 연간의 당제국의 흥성과 풍유한 삶을 통해서 우러난 낭만적인 문학 풍조는 산수의 아름다움과 전원의 한적한 생활을 구가하는 자연시를 이룩케 하는데, 이 자연시파의 대표적 작가로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거론할 수 있다. 왕유는 그림에도 뛰어나 '남화南畵의 개조'라 일컬어진다. 성당시의 낭만적인 경향은 자연시파 이외에 옛 악부의 자유로운 형식과 정열적인 기풍을 계승한 또 다른 일파의 시인을 낳게 하였으니, 그들이 곧 왕창령王昌齡, 이기李頎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변새파邊塞派이다. 이들은 국정의 문제를 주제로 삼았던 옛 악부의 한 조류를 계승하여, 전쟁이 잦은 국경 주변의 풍경과 처절한 전쟁 및 거기에서의 인간문제 등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변새파'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들 외에도 최호崔顥, 왕지환王之渙, 왕한王翰 등의 시인이 있다. 당 제국의 번영과 위세를 배경으로 발전한 자연시파, 변새시파 등의 낭만주의 문학은 이백李白이라는 시인에 의해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산수시의 정취며 격정적이고 웅대한 악부시의 풍격도 모두 흡수하여 5언 7언의 장편 단편들을 모두 다 잘 지었다. 그는 신선술과 노자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맑고 깨끗한 성격을 흠모하였다. 그리고 달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했던 그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시들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성당 시기 경제적 여유로 인한 오락의 추구는 궁정과 민간에 여러 가지 음악과 가무희歌舞戱를 비롯한 연예들을 성행케 하여, 중당 이후 새로운 문학들이 생겨나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4]
756-835년, 中唐, Middle Tang
→ 숙종(肅宗)의 지덕至德 원년부터 문종(文宗)의 태화太和 9년까지의 시기.
| 기간(연도) | 역사적 사건 | 관련 인물 |
|---|---|---|
| 755-763년 | 안사의 난(安史之亂):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 *균전제(均田制)와 조용조(租庸調) 제도의 붕괴 |
숙종(肅宗), 안록산(安祿山), 사사명(史思明),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 안경서(安慶緒), 사조의(史朝義), 방관(房琯), 이보국(李輔國), 이필(李泌), 제오기(第五琦) 대종(代宗) |
| 763-776년 | 대종 시기의 끊임없는 내란 티벳 토번의 왕 Trisong Detsan의 장안 점령(763년) 삭방절도사 복고회은(僕固懷恩)의 난(764-765년) 동화절도사 주지광(周智光)의 난(767년) 천웅군절도사 전승사(田承嗣)의 토벌과 실패(775-776년) *사자성어 장롱작아(裝聾作啞) |
대종(代宗), 정원진(程元振), 곽자의(郭子儀) Trisong Detsan, 복고회은(僕固懷恩), 주지광(周智光), 전승사(田承嗣) |
| 780-784년 | 중흥(中興)의 치 *양세법(兩稅法)과 모병제의 운용 |
덕종(德宗), 양염(楊炎) |
| 783년 | 경원병변(涇原兵變): 절도사들의 봉기와 진압 | 덕종(德宗), 노기(盧杞) |
| 783-784년 | 주차(朱泚)의 난 | 덕종(德宗), 주차(朱泚) |
| 806-820년 | 원화중흥(元和中興) | 헌종(憲宗), 두황상(杜黃裳), 이길보(李吉甫) |
| 815-819년 | 절도사 오원제(吳元濟), 왕승종(王承宗), 이사도(李師道)의 난 | 헌종(憲宗), 오원제(吳元濟), 왕승종(王承宗), 이사도(李師道) |
| 808-849년 | 우이당쟁(牛李黨爭) | 헌종(憲宗), 이길보(李吉甫), 우승유(牛僧孺), 이덕유(李德裕) |
중당中唐의 문학사적 특징:
중당中唐은 안사의 난 직후의 시기로서, 당제국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혼란과 변화는 지식인들에게 사회의식을 지니게 하여 문학작품에 현실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란을 겪는 동안 더욱 거세진 주변 다른 민족들의 영향도 새로운 문화발전에 자극이 되었다. 혼란을 통해 깨닫게 된 자기 각성 및 서민들의 고난과 저력에 대한 이해도 새로운 시와 문학의 발전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당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의 새로운 시의 창작 노력과 그를 뒷받침한 잠참岑參과 고적高適에 이어〔잠참과 고적은 전쟁이 잦은 국경지대의 처절한 풍경과 특수한 상황을 노래했던 변새파의 시를 이어받아, 내란을 틈타 외족의 침입이 잦아졌던 중당의 변새 문제를 노래하였다. 때문에 이들의 시는 성당 변새파보다도 더욱 냉엄한 태도로 현실을 반영하여, 새로운 중당의 시풍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문학 전반에 걸친 개혁운동이 진행되었던 시기이다. 비슷한 시기에 원결元結 같은 작가도 현실에 눈을 뜨며 새로운 시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뒤이어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稹 같은 시인들이 나와 이른바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전개하는 한편, 백거이는 또 무식한 노파도 알아들을 수 있는 평이한 시어를 쓰면서 저속한 서민의 서정도 추구하였다. 이밖에도 새로운 시의 창작을 시도한 유장경劉長卿, 위응물韋應物, 유우석劉禹錫, 유종원柳宗元, 이하李賀 등 많은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그 밖에도 새로운 전기소설傳奇小說이 성행하고, 그와 함께 한유韓愈와 유종원 등에 의해 문장의 형식보다도 그 내용을 중시하려는 고문운동古文運動도 전개된다. 강창체의 변문도 이 시기에 성행하였다. 그리고 민간에 유행하던 노래의 형식을 응용하여 이 시기부터 장단구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식의 시인 사詞를 문인들이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혼란을 통해서 변화를 보여준 지식인들의 성격을 반영하는, 시의 표현이나 내용에 있어 개성을 추구한 한유, 이하 같은 작가들의 시는, 만당과 송대의 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중당은 중국문학을 여러 면에서 변화시키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발전은 만당과 오대를 이어 북송으로 이어져 중국전통문학을 최고의 경지로 발전시키게 된다. [5]
전기소설傳奇小說에 관하여:
전기는 당대에 성행했던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다. 전기란 당대의 배형裵鉶이 편찬한 기이한 견문을 모아놓은 『전기傳奇』라는 책에서 유래한 호칭으로, 본시는 "기이한 것을 전술한다"는 뜻의 말이었다. 따라서 "괴이한 일을 기록한" 육조의 지괴志怪와 말뜻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판연히 다르다. 육조의 지괴소설은 기이한 예기들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것임에 비하여, 당대의 전기소설은 기이한 얘기이지만 작자의 창의에 의하여 재구성 또는 창작된 허구적인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전기소설은 지괴에 비하여 얘기에 곡절과 변화가 많고 그 속에 작자의 사상이나 인생관 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소설은 작자가 의식적인 창작태도로 얘기를 엮어내고, 또 그 얘기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인생의 단면과 인간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본격적인 소설의 개념에 훨씬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곧 전기소설의 생성은 중국소설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이다. 소재로서 당대 새로운 사회생활과 사회의식에 따른 세계관의 확대, 고문운동(전기체의 글)에 따른 문체와 이야기 서술방식의 변화,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 지어야 했던 글의 형식 또한 전기소설의 생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당대에 유행했던 도교와 불교는 전기소설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초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다. 전기소설은 초당과 성당에는 이렇다 할 만한 좋은 작품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기소설의 대표작은 중당에 나온다. 진현우陳玄祐의 「이혼기離魂記」, 심기제沈旣濟의 「침중기枕中記」〔풍자소설〕, 장방蔣防의「곽소옥전霍小玉傳」〔애정소설〕, 원진元稹의 「앵앵전鶯鶯傳」, 백행간白行簡의 「이와전李娃傳」〔애정소설〕, 이공좌李公佐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풍자소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역사소설〕, 두광정杜光庭의 「규염객전虬髥客傳」〔의협소설〕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만당으로 오면 좋은 작품의 창작은 줄어들고, 여러 가지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전기의 전집이 많이 나온다. 우승유牛僧孺의 『현괴록玄怪錄』, 이복언李復言의 『속현괴록續玄怪錄』, 설용약薛用弱의 『집이기集異記』, 배형裴鉶의 『전기傳奇』, 황보매黃甫枚의 『삼수소독三水小牘』 등이다.[6]
836-907년, 晩唐, Late Tang
→ 문종(文宗)의 개성開成 원년부터 당나라의 멸망까지의 시기.
| 기간(연도) | 역사적 사건 | 관련 인물 |
|---|---|---|
| 808-849년 | 우이당쟁(牛李黨爭) |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 이길보(李吉甫), 우승유(牛僧孺), 이덕유(李德裕) |
| 847-859년 | 대중(大中)의 치: 선종대 태평성세 | 선종(宣宗), 배휴(裴休) |
| 859년 | 구보(裘甫)의 난 | 의종(懿宗), 구보(裘甫), 왕식(王式) |
| 868년 | 방훈(龐勛)의 난 | 의종(懿宗), 방훈(龐勛) |
| 875-884년 | 황소의 난(黃巢之亂): 왕선지, 황소 등이 일으킨 반란 | 희종(僖宗), 황소(黃巢), 왕선지(王仙芝), 이극용(李克用), 주전충(朱全忠) |
| 905년 | 백마(白馬)의 화 | 애제(哀帝), 주전충(朱全忠) |
| 907년 | 당나라 멸망, 후량(後梁) 건국 | 주전충(朱全忠) |
만당晩唐의 문학사적 특징:
만당晩唐에서 오대십국五代十國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면에서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약해지기는 했지만 중당의 문학풍조가 대체로 계승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어지러운 세상때문에 사람들 개개인의 가치관에도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되어 문제에 대한 의식이 중당의 문인들처럼 철저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어지러운 세상에 뜻을 잃고 자신의 뜻을 올바로 추구하지 못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만당 시기를 문학창작이 퇴조한 시기, 또는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추구하던 유미주의 시기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한 맥락에서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며 문학의 형식과 아름답고 멋진 글을 중시하는 풍조가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시인으로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 온정균溫庭筠을 거론할 수 있다. 한편으로 혼란한 현실을 노래한 작가들로 피일휴皮日休, 섭이중攝夷中, 두순학杜荀鶴 등이 있다. 산문에 있어서는 다시 변려문이 고개를 들기는 하지만 고문운동의 명맥도 그대로 이어진다. 사詞의 창작도 이어져서 만당을 뒤이어 오대에 와서는 사는 문학으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7]
Events
Figures
618-712년: 初唐, Early Tang
| 이연(李淵) | 이건성(李建成) | 이세민(李世民) | 방현령(房玄齡) | 두여회(杜如晦) | 위징(魏徵) | 장손무기(長孫無忌) | 울지공(尉遲恭) |
| 이정(李靖) | 유홍기(劉弘基) | 우세남(虞世南) | 유정회(劉政會) | 현장(玄奘) | 이세적(李世勣) | 후군집(侯君集) | 이도종(李道宗) |
| 이치(李治) | 설인귀(薛仁貴) | 한글명(한자명) | 한글명(한자명) | 한글명(한자명) | 한글명(한자명) | 한글명(한자명) | 한글명(한자명) |
713-755년, 盛唐, High Tang
756-835년, 中唐, Middle Tang
836-907년, 晩唐, Late Tang
Footnote
- ↑ 측천무후는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친 후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리를 동원해 그녀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양성한 후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를 통한 혹리들의 정치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한다. 비록 잔혹하게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뤄나갔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 장간지 등이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녀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 장안성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잡았으며,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그 시대 현존하는 가장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동서양이 만나는 장이 바로 장안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는 당 현종 시기 조로아스터 교, 경교 등이 전래될 정도로 가장 뛰어난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을 만들기도 했으며, 50여 년동안 당나라에서의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2년 3모작이 가능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자영농이 성장했으나, 도리어 전쟁이 더 이상 발발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영토가 확보되지 않자, 자영농이 조금씩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위키피디아〉 '측천무후'의 '여제 무측천' 항목 인용.
-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210쪽. 일부내용 수정.
-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207~209쪽.
-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210-211쪽. 일부내용 수정.
-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211쪽, 234~235쪽. 일부내용 수정.
-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288~295쪽. 일부내용 수정.
-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211-212쪽, 260쪽, 일부내용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