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다녀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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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eul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8일 (화) 11:15 판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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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산 권주(갑자사화), 사락정 권질 ‧ 권전(기묘사화) ‧ 권굉, 병곡 권구(이인좌의 난)와 수곡 권보.


개요

  • 삼태사(김선평, 장정, 권행) –> 안동 권씨 시조 –> 10世 때 분파(分派 ; 복야공파 / 부호장공파) –> 가일마을(가일 권씨) : 입향조 권항 – 처가인 문화류씨의 세거지에 정착함
  • 가족은 예천으로 떠나는 등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사화에 휘말린 권주,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21세 권전,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27세 권구에게 각각 금부도사가 찾아왔던 것.
  • 가일마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로 향하는 초입에 있으면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井山)이 학의 형상을 하고 마을을 품고 있다.


화산 권주와 갑자사화

권주

권주(權柱, 1457~1505)는 1481년 문과에 급제해 경상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그러나 그는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에 연루되어 결국 죽임을 당했다.
조선의 10대 임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은 7개월에 걸쳐 자신의 생모 윤씨의 폐비 및 사사(賜死) 과정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죄를 물었는데, 권주는 성종 13년(1482) 당시 승정원 주서로서 폐비 윤씨(尹氏)에게 내려진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화를 입게 되었다. 그는 파직된 후 평해(平海 :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사약을 받아 죽었고, 권주가 죽자 정부인 고성 이씨는 자결하였다.
1506년 반정을 통해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 왕위에 올랐고, 권주는 그 해 9월 신원되어 관직과 가산을 돌려받았으며, 11월에는 장례를 치르도록 허용되었다.

권주의 아들 : 권질 ‧ 권전 ‧ 권굉

  • 맞아들 권질(權礩, 1483~1545)은 아버지 권주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을 때, 고문을 받은 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풀려났다. 그러나 동생 권전(權磌, 1490∼1521)이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죽으면서, 그 역시 예안현(禮安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으로 유배되었다가 1538년에 풀려나게 되었다.
    권질은 예안으로 유배되었을 때,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지내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불러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황은 1530년 권씨와 결혼해 그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고, 사별할 때까지 16년간 부부의 예를 갖추어 아내를 대했다.
  • 둘째 아들 권전은 수찬(修撰) 벼슬을 하던 중 기묘사화를 당해 파직되었다. 기묘사화는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들이 조광조(趙光祖)를 필두로 한 신진사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모의해 벌어진 사건이다. 권전은 기묘사화 이후인 1521년 안처겸(安處謙)·이정숙(李正淑) 등과 함께 훈구 세력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제거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송사련(宋祀連, 1496∼1575)이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신사무옥(辛巳誣獄)) 체포되어 곤장 170도를 맞고 죽었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사화에 연루되어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가문의 명맥은 막내아들 권굉(權硡, 1494~1563), 권굉의 둘째 아들 권의남(權義男, 1524~?), 권의남의 아들 권호연(權浩然, 1558~1628), 권호연의 아들 권경행(權景行, 1583~1651)으로 이어지며 간신히 이어지게 되었다.
  • 권주의 아들은 4명으로 셋째 아들의 이름은 권석(權碩)이다.

관련 유적

유적 개요 관련 사이트
화산 신도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화산 신도비는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은 넓은 사각형 받침돌과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화산 신도비
선원강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5호)
신도비 왼편에 있는 선원강당은 권주가 공부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었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 헌종(憲宗) 9년(1843)에 다시 지어졌다고 전한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를 온돌방으로 꾸민 강당과 ‘ㄴ’자형으로 지어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선원강당
병곡종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8호)
마을 중앙에 자리한 ‘병곡고택’은 본래 권주가 살던 집이다. 두 차례의 사화로 가문의 가세가 기울면서 빈 집으로 남아 쇠락했던 것을 그의 후손 권구(權渠, 1672~1749)가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을 따라 마을에 정착한 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안동권씨 병곡종택
권주와 부인 고성이씨의 묘 권주와 부인 고성이씨의 묘는 신도비와 선원강당 뒤편 언덕에 있다. 앞에 있는 것이 부인의 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권주의 묘이다. (이곳은 2016년 경북도청 신청사를 건립할 당시 공원 조성계획에 의해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묘역 앞 신도비와 강당이 연계유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그대로 보전되었다.) *[스크랩] [경북 안동] 화산 권주 선생 묘, 장안봉,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u4280/14872 -> 봉분 현장 사진
*도청 신도시 역사공원 ‘화산 권주 선생’ 묘 이장 공방, 매일신문, 2016.6.19. https://news.imaeil.com/Society/2016061916120314723?ismobile=true
*신도청 역사공원 화산 권주 경상도관찰사 부부 묘 존치 결정, nsp 통신, 2016.7.27. http://www.nspna.com/news/?mode=view&newsid=181257

지식관계망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권주 Actor 권주(權柱,_1457~1505)
갑자사화 Event 갑사자화(1504)
조선_연산군 Actor 연산군(燕山君,_재위_1494∼1506)
중종반정 Event 중종반정(1506)
고성이씨 Actor 고성이씨(?~1505 권주의 부인이다.
권질 Actor 권질(權礩,_1483~1545) 권주의 맏아들.
권전 Actor 권전(權磌,_1490∼1521) 권주의 둘째 아들.
권굉 Actor 권굉(權硡, 1494~1563) 권주의 막내 아들.
권의남 Actor 권의남(權義男, 1524~?) 권굉의 둘째 아들이다.
권호연 Actor 권호연(權浩然, 1558~1628) 권의남의 아들이다.
권경행 Actor 권경행(權景行, 1583~1651) 권호연의 아들이다.
권구 Actor 권구(權渠, 1672~1749) 권경행의 후손. 재입향조 권징의 아들. 병곡종택 중건.
기묘사화 Event 기묘사화(1519)
신사무옥 Event 신사무옥(1521)
이황 Actor 이황(李滉, 1501~1570) 권질의 둘째 사위이다.
화산신도비 Object 화산신도비
L37-0065-0000 Heritage (경상북도_문화재자료_제65호)_화산_신도비
선원강당 Object 선원강당
L37-0035-0000 Heritage (경상북도_문화재자료_제35호)_선원강당
안동권씨_병곡종택 Object 안동권씨_병곡종택
K37-0138-0000 Heritage (경상북도_민속문화재_제138호)_안동권씨병곡종택
권주_묘역 Place 권주_묘역 선원강당과 화산신도비각의 뒷산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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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arget Relation


가일마을로 돌아오다 : 병곡 권구와 수곡 권보

가일마을을 떠난 권경행, 다시 돌아온 권징

  • [종가] 38.가일마을 안동 권씨, 경북일보, 2016.12.18.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9709 -> 권주의 넷째 아들인 권굉(1494~?)이 가계를 계승했고 권굉 역시 차남인 권의남, 그의 아들인 권호연의 손자인 권경행으로 가계를 이어왔다. 권경행 대에 와서는 외가인 예천 용궁면 오룡리로 이주해 살다가 손자인 권징(1636~1698) 에 이르러 다시 가일 마을로 돌아왔다. / 권징의 아들인 병곡 권구(1672~1749)는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제자로 당시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가일 안동 권씨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이가 권구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고초를 겪은 이후에는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다.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병곡 권구와 이인좌의 난

병곡 권구(屛谷 權渠, 1672~1749)는 서애 류성룡과 갈암 이현일의 학맥을 계승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는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이 마을에 정착한 후 이곳에서 태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누명을 쓴 후 고향에서 머무르며 학문탐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해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권구의 아들, 수곡 권보

권보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관련 유적

권구는 자신의 선조 권주(1457-1505)가 살던 집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았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를 이어 사는 살림집으로, 권구의 종택은 그의 호를 따 ‘병곡 종택’으로 불린다. 병곡 종택은 권구 이후 지금까지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고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며, ‘시습재’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로도 유명하다. ‘시습’은『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2011년 대청을 중건하였다.
종택에서 경북도청 신청사 방향으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노동서사와 노동재사가 나온다. 노동서사는 영조 46년(1770)에 권구의 덕을 기리며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 사당이 없기 때문에 ‘서원’이 아닌 ‘서사’로 불린다고 한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후에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인 권오설이 서사 건물에서 원흥의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노동재사는 노동서사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숙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현 주인인 @@@이 매입한 후 개조해 @@@부터 독립책방인 ‘가일서가’로 운영하고 있다. (노동서사,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6639&cid=40942&categoryId=37713 / 노동서사, 숙박 관련 https://www.kozaza.com/rooms/1002934 / 가일서가 https://m.blog.naver.com/andongcity00/221671949116)
병곡고택 동편에는 ‘수곡고택’이 있다. 이 집은 권보를 기리기 위해 후손 권조를 비롯한 안동권씨 후손들이 1792년에 지은 것이다.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에는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닌 소박한 양식의 맞배지붕을 두어서, 평생 검소하게 생활한 권보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였다. 별당인 일지재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수곡고택은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던 우암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로 역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권오상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 1990년부터 3년에 걸쳐 별당과 안채 건물을 보수했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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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관련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