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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인 이벽 (세례자 요한, 1754-1786),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1756-1801), 그리고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 때 주교로 임명된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이다. 그리고 명도회 초기 회장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최필공 (토마스 1745-1801)・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8-1801)・이조정랑을 지낸 홍낙민 (루가, 1751-1801)・천주교회 총회장 최창현 (요한, 1754-1801)・ '내포의 사도' 이재창 (존자가 루도비코, 1759-1801)도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벽은 1785년 (정조9,乙巳)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식 제례를 지낸 일로 발생했던 진산사건 (1791) 직후에 권일신은 죽었다. 그리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은 신유옥사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순조1,辛酉) 2월 26일 (양력 4월 8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존창은 1801년 2월 27일에 공주로 호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들 외에 천주교 초창기에 전교에 공헌한 인물로 '호남의 사도'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지황(사바, ? -1795) 등과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당색이 노론이었던 김건순 (요사팟, 1776-1801)과 김백순 (세례명미상, ?-1801)도 순교하였다. 이들도 모두 다산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교유의 자취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 조선 후기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인 이벽 (세례자 요한, 1754-1786),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1756-1801), 그리고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 때 주교로 임명된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이다. 그리고 명도회 초기 회장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최필공 (토마스 1745-1801)・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8-1801)・이조정랑을 지낸 홍낙민 (루가, 1751-1801)・천주교회 총회장 최창현 (요한, 1754-1801)・ '내포의 사도' 이재창 (존자가 루도비코, 1759-1801)도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벽은 1785년 (정조9,乙巳)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식 제례를 지낸 일로 발생했던 진산사건 (1791) 직후에 권일신은 죽었다. 그리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은 신유옥사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순조1,辛酉) 2월 26일 (양력 4월 8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존창은 1801년 2월 27일에 공주로 호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들 외에 천주교 초창기에 전교에 공헌한 인물로 '호남의 사도'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지황(사바, ? -1795) 등과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당색이 노론이었던 김건순 (요사팟, 1776-1801)과 김백순 (세례명미상, ?-1801)도 순교하였다. 이들도 모두 다산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교유의 자취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 ||
− | The three leading figures behind the crea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Yi Byeok (John the Baptist, 1754-1786), Korea's first baptized Catholic Lee Seung-hoon (Peter, 1756-1801), and Gwon Il-sin (Francis Xavier, 1751-1792), who was appointed bishop by the patriarchal system. Additionally, Jeong Yak-jong (Augustino, 1760-1801), who served as first president of the Myeongdohoe organization, Choi Pil-gong (Thomas, 1745-1801), Hong Gyo-man (Francis Xavier, 1738-1801), Hong Nak-min (Luke, 1751-1801), Choi Chang-hyun (John, 1754-1801), who served as president of the Catholic Church, and Lee Jae-chang (Ludovicus 1759-1801), also known as the Apostle of Naepo, were also representative figures. Among these figures, Yi Byeok died shortly after the Eulsachujojeokbal Incident in 1785 (the 9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and Kwon Il-shin died after the Jinsan Incident (1791), which occurred when Yoon Ji-chung | + | The three leading figures behind the crea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Yi Byeok (John the Baptist, 1754-1786), Korea's first baptized Catholic Lee Seung-hoon (Peter, 1756-1801), and Gwon Il-sin (Francis Xavier, 1751-1792), who was appointed bishop by the patriarchal system. Additionally, Jeong Yak-jong (Augustino, 1760-1801), who served as first president of the Myeongdohoe organization, Choi Pil-gong (Thomas, 1745-1801), Hong Gyo-man (Francis Xavier, 1738-1801), Hong Nak-min (Luke, 1751-1801), Choi Chang-hyun (John, 1754-1801), who served as president of the Catholic Church, and Lee Jae-chang (Ludovicus 1759-1801), also known as the Apostle of Naepo, were also representative figures. Among these figures, Yi Byeok died shortly after the Eulsachujojeokbal Incident in 1785 (the 9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and Kwon Il-shin died after the Jinsan Incident (1791), which occurred when Yoon Ji-chung burned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and held Catholic rituals during his mother’s death with Kwon Sang-yeon. Lee Seung-hoon, Jeong Yak-jong, Choi Pil-gong, Hong Gyo-man, Hong Nak-min, and Choi Chang-hyun were beheaded outside Seosomun, Seoul on February 26, 1801 (April 8 based on the solar calendar, the 1st year of King Sunjo’s reign,) shortly after the Sinyuoksa, and Lee John-chang was also beheaded after being escorted to Gongju on February 27, 1801. Furthermore, Yu Hang-gum (Augustino, 1756-1801), also known as the Apostle of Honam, Yun Yu-il (Paul, 1760-1795), Ji Hwang (Sabas, ?-1801) were also known martyrs of the early days of Catholicism along with Kim Geon-soon (Yosapat, 1776-1801) and Kim Baek-soon (?-1801), who were descendants of Kim Sang-heon (pen name: Cheongum) and politically affiliated with the Noron faction. Although it is generally assumed that all of them had exchanges with Jeong Yak-yong (pen name: Dasan), but there are no traces of exchanges on the record., no traces of them were officially recorded. |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A7%84%EC%82%B0%EC%82%AC%EA%B1%B4 진산사건]=== |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A7%84%EC%82%B0%EC%82%AC%EA%B1%B4 진산사건]=== |
2021년 6월 22일 (화) 19:46 기준 최신판
시사단 비문에 담긴 조선의 역사
A History of Joseon Included in the Inscription of Sisadan Monument
시사단 비문 / 교남빈흥록 /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 / 진산사건 / 자산어보
목차
주제
국문
- 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시사단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영문
- Sisadan and its Relation with the Namin (Southerners) and Catholicism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Namin (Southerners) lost their influence as a political faction after being dismissed due to the Gapsulhwanguk incident[1] during King Sukjong reign, and were overthrown in central politics on charges of participating in the Musinran[2] of King Yeongjo's reign. Later, the Namin rose to prominenc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s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1720 -1799) as Third State Councilor (우의정) in 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1788). The appointment of a person belonging to the Namin took place almost 80 years after the Gapsulhwanguk incident.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as Third State Councilor, the Namin became one of the pillars of politics along with the Noron (Old Doctrine faction) and the Soron (Young Doctrine faction). But they were greatly affected by the Jinsan incident in 1791 in the 15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When his mother died, Yoon Ji-chung (1759-1791) and his cousin Kwon Sang-yeon (1751-1791), Catholics living in Jinsan, Jeolla Province, were executed for burning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without holding a mourning ritual. The reason why the political repercussions were so great was that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the Namin in Gyeonggi-do Province.
At that time, based on their residence, the Namin were divided into the Yeongnam Namin and the Geungi (Gyeonggi) Namin. Some of the disciples of Yi Ik (1681-1764) among the Geungi Namin came to believe in Catholicism. It spread rapidly as they were inter-connected not only by their personal relationships between the teacher and the disciple, but also by marriage. The main figures who believed in Catholicism were Kwon Cheol-sin (1736-1801), Kwon Il-sin (1742-1791), Yi Ga-hwan (1742-1801), and Jeong Yak-yong (1762-1836). As Kwon Il-shin actively engaged in local missionary work, Catholicism was spread in Jeolla-do, and Yoon Ji-chung joined Catholicism due to the mission of Jeong Yak-jeon (1758-1816), an elder brother of Jeong Yak-yong. Therefore, the Jinsan incident in 1791 did not end with the problems of both Yoon Ji-chung and Kwon Sang-yeon, but it was an event that could affect a whole group of people who were friendly to Catholicism.
Fortunately, King Jeongjo ended the case with only Kwon Il-shin being exiled, but there was a controversy that King Jeongjo covered the case without expanding it for Chae Je-gong, the head of the Geungi (Gyeonggi) Namin. Therefore, the Geungi Namin were suspected of being involved in a group of Catholics, forcing their activities to shrink.
At that time, King Jeongjo and Chae Je-gong were planning to pay respect to Crown Prince Sado, but this incident made it difficult for the Geungi Namin to lead the memorial project, and they needed supporters to help them. Therefore, Chae Je-gong turned to the Yeongnam Namin who shared roots with Geungi men. In March of 1792, in the spring following the Jinsan Incident (1791), Chae Je-gong sent Yi Man-soo (1752-1820), a close aide to King Jeongjo, to hold a memorial service for Yi Hwang (1501-1570) at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도산서원). In order to commemorate this, a special state examination titled "Dosan Byeolsi (도산별시)" was held at Sisadan in front of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for the Yeongnam Namin, and a list of successful applicants, "Gyonam Binheungrok (교남빈흥록)," was published. Through this, the Yeongnam Namin, who became supporters of King Jeongjo and Chae Je-gong, posted an appeal to the king called the "Yeongnam Maninso" in which 10,000 scholars from the Yeongnam region participated, claiming that Crown Prince Sado died unjustly and that he should be the king. As a result, public opinion in the central political community turned to the issue of Crown Prince Sado, and later became the biggest issue in politics until King Jeongjo died. This was a big change in that the Namin were able to dominate the agenda in the political framing war, but it was also meaningful in that it diluted the interest in those who were accused of Catholicism and prevented the isolation of the Namin.
In order to commemorate the special state examination "Dosan Byeolsi" held at this time, a monument and a pavilion were erected at Sisadan in front of Dosanseowon in the 20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1796). Chae Je-gong composed the inscription on the monument himself. After King Jeongjo's death, however, when the Noron faction came to power, the persecution of Catholics occurred in 1801, and Kwon Cheol-shin and Yi Ga-hwan, who believed in Catholicism, were executed. Jeong Yak-jeon was exiled to Heuksando Island where he wrote "Jasan Eobo," a book on fish in the nearby southern sea, and met Moon Soon-deuk (1777-1847) to write "Pyohaesimal," which recorded Moon Soon-deuk's sea drift. Recently, the movie "Jasan Eobo" was released.
At this time, Chae Je-gong was already dead, but was later stripped of his post and title for defending Catholicism during his lifetime. In addition, the monument and the pavilion of Sisadan erected to commemorate the Dosan Byeolsi were destroyed. It was not until 1823 that they were restored. With the construction of Andong Dam in 1975, Sisadan, which was the test site, was flooded, so a 10 meter high stone mound was built underneath Sisadan to prevent it from becoming submerged by rising waters.
- ↑ an incident in 1694 (the 2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n which the Namin, the ruling class of Joseon, tried to remove a group of people trying to reinstate the abandoned Queen Min.
- ↑ a rebellion led by the Soron such as Yi In-jwa in 1728.
주요 문화유산
시사단 비문
이 비는 1792년(정조 16년) 경상북도 안동에 건립된 도산시사단비(陶山試士 壇碑)로 채제공(蔡濟恭)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으로, 1792년(정조 16년)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그곳 송림에서 과거를 치러 영남 인재를 선발하게 했는데, 이때 응시자가 7천 명에 이르렀 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정조 20년) 여기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썼는데, 1824년 (순조 24년) 비각을 개축하면서 비석을 새로 새겼다. 현재 탁본은 안동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시기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Sisadan Monument was built in Andong, Gyeongsangbuk-do in 1792 (the 16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The text inscribed on the monument was composed and written by Third State Council Chae Je-gong. Chae Je-gong sent Yi Man-soo (1752-1820), a close aide to King Jeongjo, to hold a memorial service honoring Yi Hwang's virtue at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Moreover, a special state examination titled "Dosanbyeolsi" in which nearly 7,000 applicants participated, was held in the pine woods in front of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for the Yeongnam Namin. To commemorate this, an altar called Sisadan, along with Sisadan Monument and its protective pavilion, was made in 1796 (the 20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The inscription on its monument was orignally written by Third State Council, Chae Je-gong (pen name: Bunam), but was newly carved during the renovation in 1824 (the 24th year of King Sunjo's reign). The stone-rubbed copy, presumed to be scanned in the 1980s, is currently housed in the Andong University Museum.
교남빈흥록
조선 후기의 문신 이만수(李晩秀)가 1792년(정조 16) 왕명에 의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과장(科場)을 열어 시사(試士)한 기록과 1796년 이황(李滉)을 성균관에서 치제(致祭)한 때의 일기를 모아 편찬한 책.
Gyonambinheungrok(교남빈흥록) is a book compiled by Yi Man-soo (1752-1820), a civil official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book is a collection of records of successful applicants in a special state examination titled "Dosanbyeolsi" and diaries of sacrificial rites for Yi Hwang at Sungkyunkwan in 1796.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
조선 후기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인 이벽 (세례자 요한, 1754-1786),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1756-1801), 그리고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 때 주교로 임명된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이다. 그리고 명도회 초기 회장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최필공 (토마스 1745-1801)・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8-1801)・이조정랑을 지낸 홍낙민 (루가, 1751-1801)・천주교회 총회장 최창현 (요한, 1754-1801)・ '내포의 사도' 이재창 (존자가 루도비코, 1759-1801)도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벽은 1785년 (정조9,乙巳)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식 제례를 지낸 일로 발생했던 진산사건 (1791) 직후에 권일신은 죽었다. 그리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은 신유옥사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순조1,辛酉) 2월 26일 (양력 4월 8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존창은 1801년 2월 27일에 공주로 호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들 외에 천주교 초창기에 전교에 공헌한 인물로 '호남의 사도'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지황(사바, ? -1795) 등과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당색이 노론이었던 김건순 (요사팟, 1776-1801)과 김백순 (세례명미상, ?-1801)도 순교하였다. 이들도 모두 다산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교유의 자취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The three leading figures behind the crea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Yi Byeok (John the Baptist, 1754-1786), Korea's first baptized Catholic Lee Seung-hoon (Peter, 1756-1801), and Gwon Il-sin (Francis Xavier, 1751-1792), who was appointed bishop by the patriarchal system. Additionally, Jeong Yak-jong (Augustino, 1760-1801), who served as first president of the Myeongdohoe organization, Choi Pil-gong (Thomas, 1745-1801), Hong Gyo-man (Francis Xavier, 1738-1801), Hong Nak-min (Luke, 1751-1801), Choi Chang-hyun (John, 1754-1801), who served as president of the Catholic Church, and Lee Jae-chang (Ludovicus 1759-1801), also known as the Apostle of Naepo, were also representative figures. Among these figures, Yi Byeok died shortly after the Eulsachujojeokbal Incident in 1785 (the 9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and Kwon Il-shin died after the Jinsan Incident (1791), which occurred when Yoon Ji-chung burned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and held Catholic rituals during his mother’s death with Kwon Sang-yeon. Lee Seung-hoon, Jeong Yak-jong, Choi Pil-gong, Hong Gyo-man, Hong Nak-min, and Choi Chang-hyun were beheaded outside Seosomun, Seoul on February 26, 1801 (April 8 based on the solar calendar, the 1st year of King Sunjo’s reign,) shortly after the Sinyuoksa, and Lee John-chang was also beheaded after being escorted to Gongju on February 27, 1801. Furthermore, Yu Hang-gum (Augustino, 1756-1801), also known as the Apostle of Honam, Yun Yu-il (Paul, 1760-1795), Ji Hwang (Sabas, ?-1801) were also known martyrs of the early days of Catholicism along with Kim Geon-soon (Yosapat, 1776-1801) and Kim Baek-soon (?-1801), who were descendants of Kim Sang-heon (pen name: Cheongum) and politically affiliated with the Noron faction. Although it is generally assumed that all of them had exchanges with Jeong Yak-yong (pen name: Dasan), but there are no traces of exchanges on the record., no traces of them were officially recorded.
진산사건
진산사건 신해년(辛亥年)에 호남 진산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하고 신해사옥(辛亥邪獄), 신해옥사(辛亥獄事), 호남옥사(湖南獄事)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 권상연(윤지충의 외제)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을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그들이 사회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다. 정조는 이 사건을 이 정도에서 끝내고 관대한 정책을 써서 가톨릭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The Jinsan Incident, also called as Sinhaesaok, Sinhaeoksa, or Honamoksa, which took place in the year of Shinhae (1791), was named after Jinsan-gun, Honam (Jeolla-do province). When rumors came that Yoon Ji-chung and Kwon Sang-yeon, Catholics of Jinsang-gun, Jeolla-do province, burned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without holding a mourning ritual, the government arrested the two, questioned and charged them with disrupting social morals, and sentenced both men to death. But King Jeongjo generously ended the incident by banishing Kwon Il-sin, who was considered as leader of the Catholic Church, and declared an end to the persecution against Catholicism.
자산어보
정약전(丁若銓)이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으로 16년간 흑산도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어명(魚名), 종류, 습성, 형상 등을 기록한 책. 가경(嘉慶) 갑술(甲戌, 1814년)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며, 24.8cm×17.7cm로 매면 10행, 1행 21자로 된 3권 1책. 진기홍(陳錤洪) 소장본으로 수산학(水産學)과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의 별칭이다. 총 224항의 고기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자 어명(魚名) 밑에 속명(俗名)이라 하여 고유어 명칭을 차자 표기로 제시해 놓은 것이 175항에 달한다. 이 속명 중에 흑산도 방언이 다수 들어 있다.
Exciled to Heuksando Island for 16 years after the Shinyusaok (1801), Jeong Yak-jeon recorded the names, types, habits, and shapes of fish species in his book. It is believed to have been written in the year of Gagyeong Gabsul (1814), and its dimensions are 24.8 cm x 17.7 cm, with 21 words a line, 10 lines a page, and a total of three chapters. Stored as a collection by Jin Ki-hong, this book serves as an important role in the study of fisheries research and Korean linguistics. Jasan is another name for the island Heuksan. A total of 224 fish species are listed in this book, with 175 of them presented with an original name under the Chinese characters. A large portion of the Heuksando dialect is included among these generic names.
노드리스트
- 문화유산
ID | Class | Label |
---|---|---|
시사단 | Heritage | (경상북도유형문화재_제33호)_시사단 |
안동도산서원 | Heritage | (사적_제170호)_안동_도산서원 |
- 장소
ID | Class | Lab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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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 Place | 흑산도(黑山島) |
안동대학교 | Place | 안동대학교(安東大學校) |
- 도서
ID | Class | Lab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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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남빈흥록 | Record |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
영남만인소 | Record |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
표해시말 | Record | 표해시말(漂海始末) |
자산어보 | Record | 자산어보(玆山魚譜) |
치제문 | Record | 치제문(致祭文) |
금등문서 | Record | 금등문서(金縢之詞) |
- 사건
ID | Class | Label |
---|---|---|
신유박해 | Event | 신유박해(辛酉迫害) |
도산별시 | Event | 도산별시(陶山別試) |
사도세자추숭 | Event | 사도세자추숭(思悼世子追崇) |
진산사건 | Event | 진산사건(珍山事件) |
- 인물
ID | Class | Label |
---|---|---|
이익 | Actor | 이익(李瀷,_1681~1764) |
이만수 | Actor | 이만수(李晩秀,_1752~1820) |
채제공 | Actor | 채제공(蔡濟恭,_1720~1799) |
조선_정조 | Actor | 조선_정조(正祖,_1752~1800) |
사도세자 | Actor | 사도세자(思悼世子,_1736-1762) |
김종수 | Actor | 김종수(金鍾秀,_1728~1799) |
권철신 | Actor | 권철신(權哲身,_1736-1801) |
이가환 | Actor | 이가환(李家煥,_1742-1801) |
문순득 | Actor | 문순득(文順得,_1777-1847) |
이벽 | Actor | 이벽(李蘗,_1754-1786) |
이언적 | Actor | 이언적(李彦迪,_1491-1553) |
퇴계이황 | Actor | 퇴계이황(退溪李滉,_1502-1571) |
안정복 | Actor | 안정복(安鼎福,_1712-1791) |
권일신 | Actor | 권일신(權日身,_?-1791) |
이승훈 | Actor | 이승훈(李承薰,_1756-1801) |
이병휴 | Actor | 이병휴(李秉休,_1710-1776) |
주문모 | Actor | 주문모(周文谟,_1752-1801) |
정약현 | Actor | 정약현(丁若鉉,_1751-1821) |
정학연 | Actor | 정학연(丁學淵,_1783-1859) |
정약종 | Actor | 정약종(丁若鍾,_1760년-1801) |
정명련 | Actor | 정명련(丁命連,_1773-1838) |
정약용 | Actor | 정약용(丁若鏞,_1762-1836) |
정하상 | Actor | 정하상(丁夏祥,_1795-1839) |
황사영 | Actor | 황사영(黃嗣永,_1775-1801) |
이가환 | Actor | 이가환(李家煥,_1742-1801) |
윤지충 | Actor | 윤지충(尹持忠,_1759-1791) |
권상연 | Actor | 권상연(權尙然,_1751-1791) |
정약전 | Actor | 정약전(丁若銓,_1758~1816) |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자료
- 김문식 「교남빈흥록을 통해 본 정조의 대영남정책」 퇴계학보 110권 0호, 2021
- 정재용 「18세기 말 ~ 19세기 초 의리문제를 둘러싼 안동지역 남인과 노론의 대립」 안동대학교, 2016
- 허태용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사건의 성격」 성균관대학교, 2010
- 「안동 도산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시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교남빈흥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규현, 「南人의 家系와 天主敎 受容 :初期 天主敎 관련 인물을 中心으로」, 서강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 여진천,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교회사연구』 42, 2013.
- 차기진, 「초기 교회 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경기도 마재의 나주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1, 2008.
- 김태영, 「鹿菴 權哲身의 천주교 수용과 그 성격」, 『역사와경계』 108, 2018.
- 김봉남, 「茶山과 天主敎 관련 人物들과의 관계 고찰」, 『대동한문학회지』 41, 2014.
- 신해박해(辛亥迫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로벌한국학부 20205201 송수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