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권주와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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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권주와 기묘사화

  1. 권주는 누구인가?

권주(權柱, 1457~1505)는 1481년 문과에 급제해 경상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는 조선의 10개 임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생모 윤씨의 폐비 과정에 연루된 이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권주는 1482년(성종 13) 당시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 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장형(杖刑 : 곤장형)을 받은 뒤 평해(平海 :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로 귀양보내졌으며, 이듬해 결국 사약을 받아 죽었다. 권주가 죽자 정부인 고성 이씨는 자결하였다. 2년 후인 1506년 반정을 통해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해 9월 신원되어 관직과 가산을 돌려받았고, 11월에는 장례를 치르도록 허용되었다.

  1. 마을 내 관련 유적 -> 표로??

권주와 부인 고성이씨의 묘는 신도비와 선원강당 뒤편 언덕에 있다. 앞에 있는 것이 부인의 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권주의 묘이다. (이곳은 2016년 경북도청 신청사를 건립할 당시 공원 조성계획에 의해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묘역 앞 신도비와 강당이 연계유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그대로 보전되었다.) <이미지 / 링크 걸기 - 각주>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화산 신도비는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은 넓은 사각형 받침돌과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 이미지 / 관련 링크>

신도비 왼편에 있는 선원강당은 권주가 공부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었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 헌종(憲宗) 9년(1843)에 다시 지어졌다고 전한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를 온돌방으로 꾸민 강당과 ‘ㄴ’자형으로 지어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 / 관련 링크>

마을 중앙에 자리한 ‘병곡고택’은 본래 권주가 살던 집이다. 두 차례의 사화로 가문의 가세가 기울면서 빈 집으로 남아 쇠락했던 것을 그의 후손 권구(權渠, 1672~1749)가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을 따라 마을에 정착한 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지 / 관련 링크>

  1. 시멘틱 데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