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묘길스님(妙吉, 1900生, 비구니)

biguni
전영숙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8월 21일 (일) 18: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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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묘길(妙吉)스님은 청량사를 중창하고 후학을 양성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0 경남 밀양 출생
1914 [청량사]에서 자영(慈英)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5 월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3 만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 대교과 졸업
전국 제방선원 20안거 성만
1948 청량사 주지 취임
1970 청량사에 현대식 2층 회관 건립
1978 중창불사 및 개금불사
1980.6.5 청량사에서 입적(세납 81세, 법랍 67세)

기타사항

문중 청량사문중
수계제자 동숙(東淑)

활동 및 공헌

출가

묘길스님은 1900년 9월 17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장동일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게 되었는데, 하루는 같은 동네에 살다가 대전 복전암으로 출가한 한 스님이 어머니를 찾아와서 ‘살림도 힘든데 내가 이 애를 절에 데리고 가서 공부도 시키고 보살펴주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스님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이렇게 하여 묘길 스님은 나이 열다섯에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 길로 어머니와의 인연도 끝나고 말았다. 출가 이후 어머니를 만난 일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수행

묘길스님은 자영(慈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1915년 월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고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여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마쳤다. 1933년 만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후 전국의 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하며 부처님 법을 따르는 수행자로 묵묵히 살아왔다.

청량사 주지로 부임

스님은 1948년 나이 49세에 청량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1970년 묘길스님은 청량사에 현대식 2층 건물의 회관을 건립하였는데,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회관이었다. 그때 사중의 대중스님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불사를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스님은 동국대학교 학인스님들에게 방사를 주어 공부하도록 돕기 위해 밤낮으로 온 힘을 다하였다.

한편 스님은 어린이법회와 중고등부법회 청년법회를 여는 등 남다른 원력을 보여주었다. 연화사에서 법회를 맡고 있던 최법사가 ’법회를 해보면 어떻겠는가?'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최법사의 권유로 유마힐법회를 얻었으며, 각각의 전각에서 하나씩 말아서 하였다.

철저한 율사

스님은 철저한 율사로서 한 번도 새벽예불을 거른 적이 없는 스님은 아침 공양 전까지는 경을 독송하고, 일체의 오신채를 금하는 등 부처님의 계율을 반드시 지켰다. 한번은 연로한 몸으로 마당을 걷다가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꼬리뼈가 으스러질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평소처럼 근검절약하며 계율을 지키는 여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입적

오로지 부처님만을 바라보는 투철한 수행자로서, 불사와 후학 양성의 버팀목으로서 일생을 수행 정진하였던 묘길스님은 1980년 6월 5일 세수 81세, 법랍 67세로 청량사에서 입적하였다.

수제자로는 동숙(東淑)스님이 있다.

청량사

청량사(淸凉寺)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도량이다. 예부터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이 바로 이 곳이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일제의 조선강점흉계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케 되자 홍릉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게 되었고, 때마침 돌꽂이 승방도 사세가 기울어 두 절이 병합되었다고 한다. 청량사는 한말에는 도성 사람들이 자주 몰려와 쉬던 휴양지였고, 일제 치하로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많은 애국지사, 고승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 불교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1939년 7월 12일에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씨로 전해진다. 청량사는 회한의 역사 속에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불심으로 도량을 가꾸어온 비구니대중스님들을 보듬어 안고 오늘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원행으로 도심 속에 회향하고 있다.

연혁

신라말엽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청량사는 창건주와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문헌에서 보이는 청량사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예종 12년(1117) 9월 조에 고려중기 거사불교(居士佛敎)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절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다.

이자현은 당시의 문벌귀족가문인 이자연(李資淵)의 손자로 벼슬을 버리고 춘천 청평산(淸平山) 문수원(文殊院)에서 은거하면서 고려중기의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가 서울 삼각산 청량사에 잠시 머물면서, 성품을 기르는 요체가 무엇인가를 묻는 예종에게 그 답안으로 「심요(心要)」 1편을 지어 바쳤다는 것이다.

원래 지금의 홍릉 자리에 있었던 청량사는 1895년 일제의 조선강점흉계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정변 이후 청량사터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케 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돌꽂이절인 석고사(石串寺)를 청량사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김정호(金正浩, ?~1864)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지금의 홍릉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현재의 임업시험장 자리에는 돌꽂이절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절은 별개의 사찰이었으나 홍릉조성으로 청량사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고, 돌꽂이절 또한 폐사되면서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청량사는 1890년대를 기점으로 신명을 다바친 비구니 스님들의 큰 원력에 의해 본격적인 중창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1894년 돌꽂이절에서 남채백(南彩白) 비구니 스님이 법당과 칠성각을 청량사로 옮겨 대니승방(大尼僧房)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이후 김봉학(金奉學), 신자영(申慈英), 장동일(張東日), 정부연(鄭富淵), 신원삼(申元三) 비구니 스님들의 연이은 불사가 이어졌다.

한편 1939년 8월 29일에는 이광(李洸), 이원혁(李原赫), 장도환(張道煥), 김관호(金觀鎬),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眞), 이병우(李炳宇), 안종원(安鐘元) 등 20여 명의 지사들이 함께 모여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스님의 회갑연을 위로하며 망국의 한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이후 최근 30여년간은 혜은(惠恩), 상길(相吉), 혜명(蕙命), 동숙(東淑), 성법(性法) 비구니 스님들이 주지에 취임하여 중창과 도량정비 및 교화사업에 매진하여 오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93~96.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3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6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묘길(妙吉)스님 본항목 묘길스님(妙吉,1900~1980) 妙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길스님(妙吉,_190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묘길(妙吉)스님 청량사문중 ~의 일원이다
묘길(妙吉)스님 자영(慈英)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묘길(妙吉)스님 청량사 ~에서 출가하다
묘길(妙吉)스님 월해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묘길(妙吉)스님 만우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묘길(妙吉)스님 청량사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묘길(妙吉)스님 청량사 ~을 중창하다

사찰

  • 청량사(☎ 02-962-7390):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