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수환스님(修還, 1950生, 비구니)

biguni
Ehjkkims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26일 (화) 04: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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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현공(玄空) 수환(修還)스님은 지역 발전과 청소년 교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실천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0 경북 김천 출생
1965 문경 김룡사에서 혜엽(慧燁)스님을 은사로 출가,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6 동학사 강원 졸업,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석남사, 대성암, 삼선암 등에서 10안거 성만
1986 학림사 중창 불사
1994 동학사 강원 총무
1998 학림사 주지 취임
2000 대만 불광사 수행 정진
2004 중국 선원에서 용맹 정진
문중 보운(普雲)문중
생활신조 항상 초발심자로 돌아가자.
상훈 연기군수 청소년 교화 표창장(1986)
수계제자 성효(成曉)·능행(能行)·능학(能學)·능인(能印)

활동 및 공헌

소록도와의 인연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282

현공(玄空) 수환(修還)스님은 1950년 음력 2월 20일 경북 김천시 남면 지산동 72번지에서 아버지 임판석과 어머니 위팔님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이며, 이름은 임말선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시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지만 지역의 유지였던 아버지 덕택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 그래서인지 동네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부모님께 부탁드려 도움을 주곤 하였다.

사춘기로 접어든 어느 날 스님은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상념에 잠기게 되었다. 신문 기사는 정상인 아이들이 나환자촌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더 이상 나환자촌 아이들한테 배울 길이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스님은 그 기사를 보고 갑자기 ‘왜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배우고 누구는 배우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나병이 대체 무슨 병이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전염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전염되지 않는가’를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는 나병에는 음성과 양성이 있는데 현재 소록도에는 전염되는 양성 증세가 심한 환자만 모여 살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에 스님은 소록도 아이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칠 수 없는가를 묻는 편지를 보냈고, 곧바로 흔쾌히 허락하는 답장을 받았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둔 채 스님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큰 결심을 하고 소록도로 떠났다. 그렇게 소록도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쯤 됐을 때 마침 그곳으로 시찰을 나온 교육감이 스님을 보고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참으로 기특한 일이긴 하지만 다니던 학교는 마저 끝마치고 오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을 하였다.

그 후 스님은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가 우연히 탁발을 나온 한 스님을 뵙게 되었다. 김천 직지사에 다니러 왔다가 책을 한 권 사고 나니 돌아갈 차비가 모자라 탁발을 하고 있던 스님이었다. 갈 길이 먼 탁발 스님을 안타까이 여긴 부모님은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고 배려를 해드렸는데, 스님한테는 평소 자신이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어볼 기회가 자연스레 생긴 셈이었다. 스님은 그분에게 먼저 왜 스님이 되었는지부터 물었다. 도를 깨달아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고 출가를 했다는 탁발 스님은 ‘도란 영원한 것이며, 속세의 모든 것이 변할지라도 도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은 큰 감동을 받아 출가의 뜻을 품었다.

출가

수환스님은 1965년 1월 20일 문경 김룡사 혜엽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긴 행자 생활을 마치고 난 스님은 강원 입학을 앞두고 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 당시 강원에 들어갈 때 먹을 것과 여비 등을 각자가 부담했기 때문이다. 김룡사의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스님은 스스로 소임을 살아 경비를 충당해가며 1976년 3월 20일 대교과를 졸업하기에 이른다.

수행

평소에 늘 여일하게 안거를 거르지 않으며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하시는 창법 사숙님을 존경해오던 스님은 마음속으로 사숙님처럼 열심히 정진하며 살리라 다짐하고 뒤따랐다. 그런 가운데 형님처럼 모시던 석천스님이 몸이 편찮게 되는 바람에 태고종 스님이 관리하고 있던 사찰을 아는 보살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물면서 1976년 석남사에서 하안거 수선 이후 범어사, 해인사 등 제방 선원에서 10안거를 성만하며 화두를 참구하는 한편 해제 철에는 석천 스님을 모시며 지냈다.

학림사와 인연

그러다가 1984년 우연히 학림사에 오게 되었다. 학림사는 문헌상으로는 불확실하나 오래 전에 폐허가 된 절인데 1960년대에 안선불 씨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 다시 세웠다. 스님이 왔을 때는 보수할 데가 한두 곳이 아닐 만큼 방치되어 있었다. 스님은 석천스님, 수환스님과 함께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보태어 불사를 시작하였다.

1986년 중창 불사를 하다가 너무 힘든 나머지 해태심을 내게 된 스님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기도라 생각하고 당시 학림사 주지를 맡았던 석천스님에게 허락을 얻어 49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런데 마지막 회향날 밤을 지새우며 기도를 하고 난 뒤 아침에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방문을 여니 스님들 몇 분이 둘러앉아 계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조심스레 절을 올리려는 순간 방 저쪽에서 ‘그냥 앉아라!’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스님의 아픈 다리를 끌어당기더니 침을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는데 묘하게도 다리가 가뿐했다. 그때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아픈 일이 없었다. 스님은 이외에도 기도 가피를 여러 번 입었다.

스님은 한 가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를 구하는 자의 자세라고 강조한다. 학림사에 있을 때도 안거 철에는 제방에 나아가 참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학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다

위봉사에서 결제 중이었던 어느 날 스님은 동학사에 총무 소임이 나왔는데 스님이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받았다. 몇 번이고 거절을 하다가 대중을 위해서 소임을 살아달라는 간곡한 말에 결국 1년간 총무를 맡았다. 1994년의 일이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주지를 맡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지키기가 어려웠다.

학림사 주지소임을 맡다

학림사 전 주지스님의 간청으로 1998년 학림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만과 중국에서 수행하다

스님은 2000년에는 대만 불광사에서 수행 정진을 하였고, 2002년에는 중국 선원에서 용맹정진을 하는 등 늘 기도와 참선 수행을 닦으며 흐트러짐 없이 초발심자의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한편 지역 발전과 청소년 교화에도 많은 관심과 실천을 기울여 연기군수와 면장으로부터 표창장 및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

2004년 수환스님은 학림사 주지로 재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성효(成曉)·능행(能行)·능학(能學)·능인(能印)스님 등이 있다.

연기군 학림사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인 김선원은 충남 연기군 서면 신대리 268-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학림선원의 창건연대와 창건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각종 사료와 유적을 통하여 살펴보니 조선조 말엽으로 숭유억불정책이 극심하였던 1840년 전후로 추정이 된다. 국운이 날로 쇠퇴하면서 관리들과 유생들의 폭정이 극심하던 때에 사찰을 창건 ㆍ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창건을 한 스님과 신도들의 피땀 나는 노력과 그 원력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절이 창건된 이후에는 스님들이 주경야선을 하면서 수행을 하여 인근 불자들의 안식처가 되었지만, 6.25전쟁을 전후로 폐사가 되었다. 이후 폐허가 되어 절 터만 전해지던 것을 1963년경 안선부 불자가 절터와 부근의 땅 800평 매일 하여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사찰을 중수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별당 11평, 요사체 13평을 지어 절 이름을 '안양사'라 하고, 스님들을 모셔 수행과 전법의 도량으로 가꾸기 시작하였다. 1984년에는 비구니 석천, 보은, 수환이 새롭게 부임을 하여, 사체를 털어 절 주변의 임야를 14000여평을 매입하고 중장불사를 일으켰다.

전통 건축양식에 따라 대웅전 및 선방을 건립하고 요사채 30평을 건립하여 사찰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여 절의 이름을 새로 지어 학림사(林寺)라고 했다. 또 1999년에는 관음전과 2008년에는 지장전을 건립하여 수행과 기도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1992년에는 스리랑카 국립대학 한국 캠퍼스 학장인 가산스님의 인연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와 태국에서 전용스님께서 모시고 계시던 사리 23과를 학림사에 이운 봉안하였고, 1998년에는 스리랑카 '아누루다뿌라'에 있는 8대 사찰에 들어가는 '미니세비타아사원 주지 야날딜라카 스님께 서 1800년이 넘는 오래된 사리탑이 지진으로 다시 복원하게 될 때 출토된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를 학림사에 봉안해주시므로 사리 25과를 모신 사리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선원과 기도 전각을 비롯하여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건립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전법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280~28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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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수환(修還)스님 본항목 수환스님(修還, 1950~) 修還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환스님(修還,_195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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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1 항목2 관계
수환(修還)스님 보운(普雲)문중 ~의 일원이다
수환(修還)스님 혜엽(慧燁)스님 ~의 제자이다
수환(修還)스님 문경 김룡사 ~에서 출가하다
수환(修還)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수환(修還)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수환(修還)스님 연기군 학림사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수환(修還)스님 연기군 학림사 ~을 중창하다

지도

  • 학림사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신대리 268-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