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지원스님(智圓, 1938生, 비구니)

biguni
탄호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9일 (화) 17:12 판 (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 = 지원(智圓)스님 |사진 = 정안스님.jpg |법명 = 지원(智圓) |법호 = |속명 =...)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지원스님은 한마음 닦기 위해 출가의 길을 걸은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으로 옥천 선산자락에 대림선원을 창건하고 주지로 주석하다.

생애

연도 내용
1938 충북 옥천 출생
1964 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
1985 대림선원 창건
대림선원 주지 옥천불교사암연합회 회장
2022 대림선원 주석

기타사항

문중 수정(水晶)
수계제자 광법(光法)·광용(廣鎔)·연탁

활동 및 공헌

출생

지원智圓스님은 1938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에서 아버지가 해와 달을 삼키는 태몽을 꾼 뒤 4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이며, 이름은 곽정명이다.

식솔이 50명이나 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복이 많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기도 힘들던 때에 세 분의 어머니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세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혼자되신 숙모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백모, 그리고 친어머니였다.


어린시절

지원스님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조카들과 함께 변소나 돼지막 뒤로 숨어들어가 몰래 책을 볼 정도였다. 아이를 업고 있는 동안에는 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스님은 좀처럼 아이를 등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어른들이 ‘왜 애를 내려놓지 않고 계속 업고 있느냐.’며 꾸중을 하면 일부러 꼬집어 울게 만들어서 책을 못 볼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스님은 불행히도 시력이 좋지 않았다.


출가동기

그러나 부유했던 집안의 가세는 점차 기울기 시작하였고, 오빠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래서 스님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스님은 남의 돈을 빌려 뽕나무를 심고 보리와 콩 농사 등을 지었으나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소출은 아주 적었다. 양식이 턱없이 부족하여 식구들은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고, 할 수 없이 죽을 끓여 먹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님은 일하는 사람들만큼은 밥을 해 먹였고, 스님 자신은 식솔들 부양을 잘 못한 자책감에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스님은 평소 남이 백 원 쓸 때 구십 원을 쓰고, 남이 칭찬받을 때 덜 받고, 남이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할 때 그 일을 맡아서 하고, 남이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덜 먹으며 모든 면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뜨는 찰나에 “모든 것이 내 욕심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고, 곧이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한 마음 닦기 위해 출가의 길을 걷다

기울어진 가세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스님은 식구들을 모두 불러 출가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둘째 오빠가 출가를 만류하며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만약 네가 입산을 했는데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것은 국운이고 시대의 운일 뿐이에요. 지금 나는 시집을 가느냐 입산을 하느냐의 기로에 서있는데, 사회주의가 되는 것을 기다리다가는 하세월이에요. 십 년이 될지 백년이 될지 누가 알아요? 국운과 시대의 운에 내 개인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어요.”

“나중에 너를 받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할 테냐.”

“부모님이 우리 팔남매를 낳아서 키웠지만 지금 우리가 같이 받들어 모시고 있나요.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 않은가요. 내가 복이 있으면 나를 받들어줄 사람이 생길 거라고 믿어요.”

“출가해서 회의감이 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오빠는 나를 20년 넘게 지켜보지 않았나요? 내가 한 마음이라도 닦으러 가지 나를 버리러 선택하는 것은 아니니 나를 믿어주세요.”

출가를 만류한 것은 비단 오빠만이 아니었다. 스님의 올케는 몇날 며칠 동안 단식을 하는 등 식구들의 반대는 매우 극심했다.

그러나 이미 발심한 스님은 그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1964년 12월 5일 인근 용암사 스님의 소개로 속리산으로 갔다가 은사스님인 일휴(一休)스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낙산사 홍련암에서

스님이 은사스님을 따라 낙산사 홍련암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당시 홍련암에는 쥐가 아주 많았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한 스님이 발로 툭툭 차는 것이었다. 잠에서 깬 스님이 가만히 들어보니 쥐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외출하신 은사스님을 위해 공양상을 준비해 두었는데, 쥐들이 상 위의 음식을 먹으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두 스님은 쥐를 잡으려고 밤새 잠을 안 자고 기다렸다. 드디어 쥐가 모습을 드러내자 지원스님이 호통을 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미물인 짐승이라 해도 어른도 몰라보느냐.”

그러자 쥐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듯하더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신기하게도 쥐가 절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넋을 잃은 경험이 세 번

개심사 강원 시절 쌍계사와 통도사에서 자민스님, 진우스님과 함께 경 불사를 하기도 했던 지원스님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넋을 잃은 경험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경험은 초등학교 때였다. 하루는 저녁 새참을 가지고 들로 나가는 길에 난생 처음 비구니스님을 보았는데, 그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 뚝 떨어지며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스님은 붙박이처럼 우뚝 서서 비구니스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수정암으로 여행을 갔는데, 어떤 스님은 대나무로 등을 만들고 어떤 스님은 전을 부치고 또 다른 스님들은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그 순간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님은 그때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부러운 시선으로 스님들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는 출가 후에 경험하였다. 처음 선방을 보았을 때인데, 고요한 가운데 서늘하고 단단한 스님들의 모습에 다시 넋을 놓고 만 것이다.

그리고 선대의 산소를 정리하러 고향 삼청리에 갔다가 사찰 건립의 원력을 세우고 불사를 했다. 선산 일대에서 대림사를 창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속가 문중 어른들의 권유도 있었다고 한다.

기와집 법당이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며 영산전, 원통보전, 명부전 등으로 변모한 대림사는 전국의 사진작가며, 등산가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장령산 자락에 앉아 있다.

장령산은 바위와 숲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산으로 새벽 운해 속에서 떠오르는 일출 풍경으로 인해 이름난 곳이다.

장병들의 식당을 수리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대림선원 지원스님과 명효스님은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37사단 111연대 부대의 초대로 김홍배 37사단장의 감사패를 받았다.

옥천불교사암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지원스님은 2022년 현재 충북 옥천 대림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광법(光法)·광용(廣鎔)·연탁스님이 있다.


사찰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648 대림선원



참고자료

대림사. 대림선원/충북 옥천군 옥천읍 [출처] 대림사. 대림선원/충북 옥천군 옥천읍|작성자 목야 2019. 7. 3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지원(智圓)스님 본항목 지원스님(智圓, 1938~) 智圓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지원스님(智圓,_193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지원(智圓)스님 충북옥천 ~에서 출생하다
지원(智圓)스님 일휴(一休)스님 ~을 은사로 출가하다
지원(智圓)스님 혜암(惠庵)스님 ~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다
지원(智圓)스님 대림선원 ~을 창건하다
지원(智圓)스님 옥천불교사암연합회 ~의 회장을 역임하다
지원(智圓)스님 대림선원 ~에서 주석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