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효천스님(曉天, 1941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4일 (토) 19:51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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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효천(曉天)스님은 서산 부석동사에서 혜법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서산 혜명사를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1 충남 서산 출생
1960 서산 동사(東寺, 東庵)에서 혜법(慧法)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2 광덕사에서 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9 개심사 강원 졸업
1976 마곡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2 혜명사 중창
2004 혜명사 주지
2021 혜명사 회주
문중 육화문중(六和)
수행지침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활동 및 공헌

출가

[효천스님]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82
[혜명사]
출처: 섬과 바다 이야기(티스토리) https://rah0102.tistory.com/574

효천스님은 1941년 6월 2일 충남 서산군 부석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조길자이다. 스님은 안타깝게도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묘지에 묘를 쓸 때 사람들이 땅을 쿵쿵 밟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고, 그때의 경험은 훗날 스님이 출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스님은 아버지를 땅에 묻던 그날의 광경을 오래도록 잊지못했다. 밤에 누워 있으면 마치 스님이 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듯하였고, 그 무덤을 누군가 밟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스님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14살이나 15살 무렵 시집을 갔는데, 결혼을 위해 미리 20~30벌 정도의 옷을 마련해놓고는 하였다. 그런데 스님은 도무지 혼인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독립하여 혼자 살 계획을 세우며 돈을 모아나갔다. 결혼을 하면 남자에 예속된 채 식모살이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여자의 일생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어느 날 ‘개심사에 가면 공부를 시켜준다.’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마침 두통이 심해 개심사에 요양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0년 나이 20살의 일이었다. 은사스님은 상좌인 효천스님밖에 모를 정도로 매사에 정성을 다해 보살펴주셨다. 때로는 불같은 면도 있었지만 칠십 평생을 상좌와 함께하면서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셨다. 효천스님은 출가하면 평생 공부만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개심사 강원에서 사교를 공부할 즈음 은사스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공부를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른을 거역하고 살아서 큰 출세를 할 것인가! 이것도 하나의 수행이고, 은사스님 모시는 것도 공부인데...’

스님은 강원 공부를 중단하고 은사스님 곁으로 돌아왔고, 은사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어 하시면서도 늘 효천스님에게 고마워하셨다.
효천스님은 개심사에서 처음으로 탁발을 하였다. 그런데 남 보기에 부끄러워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님은 수행이 부족해서 그런 것만 같아 자신을 경책하였고, 노스님이나 은사스님이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 깊은 반성을 하였다. 노스님은 탁발할 때 볼일을 보게 되면 그것을 종잇조각에 싸가지고 와서 콩밭에 묻을 만큼 근검절약 하는 분이셨다.

혜명사로 오다

효천스님은 1982년 세수 41세에 지금의 혜명사로 오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1년에 6번이나 주지가 바뀌기도 했는데, 스님이 오신 뒤 오늘날까지 혜명사에 주석하며 수행하고 있다. 스님이 처음 혜명사에 온 후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부처님이 한 분 한 분 현몽하셨다고 한다. 혜명사에 머물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내심 고민할 때는 꿈에 후불탱화 속의 부처님께서 열쇠꾸러미를 주시며 혜명사가 스님의 인연 터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이후 스님은 종종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을 위해 천도재를 올리고 지장기도를 해주어 병을 낫게 하였으며, 신기하게도 많은 일들을 현몽으로 알게 되거나 해결하곤 하였다.
효천스님은 혜명사 법당 중창 불사의 원력을 갖고 있었다. 그 원력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부처님 대웅전 하나 작품처럼 멋있게 남기고 회향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푼 두 푼 모았는데, 그것을 잘못 쓰면 업을 짓는 것이니 업 짓지 않게 노력해야지요.”
스님은 지금까지 많은 아이들을 기르고 보살펴 왔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키우다

네다섯 살 되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스님은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한번은 사춘기에 접어든 한 아이가 ‘자기를 뭐 하러 데려다 키웠냐.’고 물어왔다. 그때 스님은 “그래. 그래도 누가 키워도 키워야 했을 거다. 난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스님은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늘 깊은 사랑으로 대하였고, 스님의 자비로움 덕분에 아이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효천스님은 바쁜 가운데서도 붓글씨를 쓰고 있는데, 먹을 갈아 한 획 한 획 조심스럽게 써내려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수행자로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어
      종이와 묵을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음이라.
      펼쳐 보아도 한 글자가 없으나
      항상 대 광명을 놓음이라.

2021년 혜명사 회주로 수행 정진 중인 효천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80~83.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582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7, 423
  • 티스토리, 혜명선원(2017년) https://rah0102.tistory.com/574
  • 불교신문, 혜명사 회주 효천스님 중앙승가대 5000만원 희사 (2021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75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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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천(曉天)스님 본항목 효천스님(曉天, 1941~) 曉天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효천스님(曉天,_194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효천스님(曉天)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효천스님(曉天) 혜법스님(慧法) ~의 수계제자이다
효천스님(曉天) 서산 동사(동암) ~에서 출가하다
효천스님(曉天) 혜암스님(慧庵)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효천스님(曉天)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효천스님(曉天) 서산 혜명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효천스님(曉天) 서산 혜명사 ~을(를) 중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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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명사 :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57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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