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스님(性珠, 1946生, 비구니)

biguni
수경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30일 (목) 16: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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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성주(性珠)

법호 : 향림(香林)

속명 : 이은직(李殷稷)

출생년도 : 1946. 12.27

주소 :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2리 봉곡사


정의

향림(香林) 성주(性珠)스님은 통도사 취운암에서 일광(一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김천 봉곡사를 중창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6 충북 제원 출생
1962 통도사 취운암에서 일광(一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3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5 대원사 안거 성만
1967~1969 운문사 강원 졸업
1969~1971 양진암에서 동·하안거 성만
1970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1 내원사에서 동안거 성만사
1972~1973 해인사에서 약수암, 삼선암 하·동안거(3년) 성만
1973 청암사 주석
1974 속리산 성불사 5년간 주석
석남사 안거 성만
백흥암 안거 성만
1979 김천 봉곡사 주석, 봉곡사 중창 불사
2004 봉곡사 총무
2020 봉곡사 주지



  • 문중 : 일엽(一葉)문중 제3대손
  • 수행지침 : 해태하지 말고 정진하자.
  • 생활신조 : 밝고 맑게 사는 것
  • 특기 : 간경(看經), 원예(園藝)
  • 취미 : 『법화경』 사경
  • 수계제자 : 동현·현탁·현조

활동 및 공헌

출가

향림(香林) 성주(性珠)스님은 1946년 12월 27일 충북 제원군 청풍면 양평리에서 아버지 이태하와 어머니 달성 서씨 서임석의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은직이다.

스님의 나이 17세 되던 무렵은 불교종단 정화시기로 비구와 대처승이 대립하는 와중이었다.

그해 여름 한 비구스님이 스님의 동네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 스님이 어찌나 좋아 보였던지 성주스님은 무작정 집을 나와 해인사 홍제암으로 갔다. 그러나 인연이 없었는지 그곳의 스님 소개로 통도사 취운암으로 가게 되었다.

성주스님은 통도사 취운암에서 일광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1962년 음력 9월에 삭발염의하였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63년 3월 15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성주스님은 행자 시절에 이미 『치문』과 『사집』을 모두 공부하였다.


수학과 수행

스님의 효심은 참으로 각별하여 1967년 22세의 나이로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면서 은사스님을 차마 홀로 둘 수가 없어 모시고 함께 들어갔다.

스님은 은사스님을 시봉하면서 곧바로 사교반(능엄반)반으로 들어가 1969년에 대교를 수료하였다.

그해 겨울 양진암에 방부를 들이고, 1971년 하안거까지 1년 6개월 동안 안거를 성만하였다.

1970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한 스님은 이듬해 내원사에서 동안거를 성만하고, 이후에는 남해 보리암에서 백일기도를 하였다.

스님은 1972년부터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1974년에는 석남사, 백흥암 등에서 하안거와 동안거, 다시 하안거를 계속하여 3안거를 성만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청암사에 들어가 겨울을 났다. 1974년부터 속리산 성불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5년을 머물렀다. 그리고 1979년에 현재의 봉곡사로 왔다.


봉곡사로 오다

스님은 성불사가 사설 사암이다 보니 늘 신세를 지고 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방부를 들이려 해도 이것저것 걱정이 되고 신경 쓰는 일이 많은 게 싫어서 봉곡사로 오게 되었다.

성불사에서 스님은 5년 동안 살았으나 양말 한 짝도 얻어 쓰지 않을 정도로 꼿꼿하게 살아서인지 성불사에서 나올 당시 사찰의 보살님이 두루마기를 한 벌 해주었다고 한다. 스님은 옷을 안 받으려고 하였지만 간곡히 권하는 보살님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입고 나왔다.

또한 스님은 그 사찰을 나올 때 다음에 누가 와서 살더라도 불편함이 없게끔 다 준비해 놓고 나왔다.

그러나 정작 봉곡사에 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힘이 많이 들었다. 봉곡사는 1300년의 유구한 세월을 이겨온 고찰이었으나, 스님이 당도했을 당시의 마당은 돌밭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상황이라 여러 가지를 손보며 살아야 했다. 스님이 팔을 걷어 부치고 중창 불사를 한 결과 마침내 오늘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은사이신 일광(一光)스님

스님은 은사스님을 19년 동안 모시고 살았는데, 은사스님에 대해 ‘성품이 지순차순하며 자비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말한다.

은사스님은 엄할 때는 엄했지만 당당하고 고요한 분이셨다. 은사스님은 항상 ‘은현동시隱現同時, 즉 나타날 때나 아닐 때나 똑같이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은사스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았는지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에는 도반스님들이 보증수표라고 할 만큼 모든 일에 빈틈이 없었다.


봉곡사의 엄격한 생활

도반스님들이 봉곡사에 와서 보고는 ‘독살이인 줄 알고 왔더니 대중살이보다 더 엄하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봉곡사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밤 11시에 취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스님은 ‘사찰의 기강은 풀어 놓으면 풀어 놓는 대로 한도 끝도 없다. 동여매면 매는 대로 되어진다.’고 강조한다.

봉곡사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아침 9시 전까지는 1,000여 평의 도량을 청소하고, 낮에는 소임을 마치고, 저녁 5시 공양 후에는 낫과 호미를 들고 들에 나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 평소에 스님은 백장청규를 철칙으로 실천해 나가며 채소와 야채는 직접 심고 가꾸어 자급자족으로 해결하고 있다.

스님은 지병인 허리 통증이 있지만, 하루에 8시간 정도를 정진한다. 스님의 말씀인즉 ‘아프다고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다. 동여매면 통증을 완화할 수가 있다고 한다.

평소에 사경을 하는 스님은 그동안 전등록을 사경했고, 현재는 『법화경』을 사경하는 중이다.

2004년 현재 김천 봉곡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성주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현·현탁·현조스님이 있다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김천인터넷뉴스, 비봉산(飛鳳山) ‘봉곡사(鳳谷寺)’남과 다르다고 이를 흉보지 말일이다. (2009년)

http://gcinews.com/front/news/view.do?articleId=11523

법보신문, 9. 김천 비봉산 봉곡사 (2012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3316

직지사, 봉곡사 성주스님 임명장 수여(11.18) (2020년)

http://www.jikjisa.or.kr/bbs/board.php?bo_table=4010&wr_id=1268

황악신문, 봉곡사 (鳳谷寺)...봉황이 점지한 골짜기 봉황의 알도 있어 (2021년)

http://www.hwangak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1

불교닷컴, 자장이 선택한 절터 (2022년)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1463

유튜브, 비봉산 봉곡사 김천여행

https://www.youtube.com/watch?v=ZUK3i1ly7mc


김천 봉곡사

홈페이지: http://www.jikjisa.or.kr/bbs/board.php?bo_table=107020&wr_id=39

https://blog.naver.com/bonggoksa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922년(태조 5)에 승려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이 산 너머에 있는 구성면 연곡(燕谷)에 절터를 닦고 목수를 불러 재목을 다듬는데,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재목을 다듬고 난 조각들을 자꾸 물어가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따라가 보니 지금의 봉곡사 터였다.그 자리가 더 훌륭한 곳임을 판단한 도선은 자신이 미물인 새만도 못하다고 탄식하면서 자리를 옮겨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전성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40여동의 당우와 오층석탑·석교(石橋) 등이 있었으며, 승려 1,000여명이 기거하였고 경남 일원과 전북 일원까지 말사(末寺)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소규모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명부전·동상실(東上室)을 비롯하여 부속건물 2동이 있다. 대웅전은 1707년(숙종 33)에 세 번째의 중수를 거쳐 1916년에 단청과 함께 중수되었으며, 명부전은 1690년에 승려 대완(大完)이 중건하였고, 1908년에 중수하였다.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298


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1913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7~14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89.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54, 440.


봉곡사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길 1224-5 (대덕면 조룡리 880) 054-437-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