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지환스님(知幻, 1261生, 비구니)

biguni
공연옥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9일 (수) 23: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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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출가한 청경 지환스님은 군산 흥천사를 개산하여 두 차례의 대대적인 불사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인재 양성과 포교에 매진하신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6 전북 김제 출생
1946 혜월(慧月)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8 정혜사에서 보광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 전주 정혜사 강원 졸업
1959 정혜사에서 묵담(默潭)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흥천사 총무
1959 군산 충의사(忠義祠)를 인수하여 흥천사(興天寺)라고 함
1964~1971 가람 불사
1972 흥천사 주지
1979~1995 내원사, 세등선원, 윤필암, 삼선암, 반야선원 등에서 안거 성만
1984~2000 부처님 진신사리를 5층 석탑에 봉안 불사
1984~2004 대한불교 보문종 종회의장
1987 반야유치원 원장 취임. 대한불교 보문종 종회의장
1994 시민선방 개원
2014 라오스 던롬지환초등학교 개교
2021 현재 흥천사 회주
문중 계민(戒珉)문중
수계제자 법희(法熺)·법능(法能)·법운(法雲)·법전(法田)·법묵(法默)·법종(法種)·법송(法松)·법견(法見)

활동과 공헌

동진출가

청경(淸景) 지환(智環)스님은 1936년 6월 18일 전북 김제에서 아버지 이광춘과 어머니 오이순 사이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정임이다.
스님을 잉태하기 전 어머니는 매우 상서로운 태몽을 꾸셨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스님이 놋쇠로 된 밥그릇을 주시며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받으려 하자 스님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받으려 하냐.'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감사히 받아들고 뚜껑을 열어 보니 하얀 쌀밥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스님은 어렸을 때 딸이 없는 외삼촌댁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그 후 보름 만에 할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을 사랑해주던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시게 된 것이다. 가족의 잇단 죽음 앞에 어린 스님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겨우 열 살, 우리 민족이 36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의 일이었다.
두 분을 위하여 절에서 49재를 지내게 되었는데, 어린 스님도 참석하여 법사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법문 중에 한 집에 스님이 한 명만이라도 나면 9대가 왕생극락한다는 말씀에 큰 영향을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 큰스님을 통하여 자신도 스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스님은 집으로 돌아와 출가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속가의 할머니는 어린 손녀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죽기를 각오하고 출가를 주장하여 간신히 승낙을 얻은 후 절에 오게 되었다.
지환스님은 1946년 10월 20일 11세의 어린 나이로 정혜사에서 혜월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 했다. 그렇지만 신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스님은 염불과 절 생활이 너무 고달파 밤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할머니에게 돌아갈 것을 다짐하곤 했다.


행자시절

그러다가 다음날이면 부처님 앞에서 염불을 하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스스로 출가의 결정을 내린 사람이 이런 작은 고생을 핑계로 흔들리면 안 된다고 자신을 경책하며 조금씩 절집 생활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다짐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으나 밥하는 방법조차 몰랐던 스님에게는 일을 배우는 모든 과정이 어렵기만 했다. 행자 시절에 한번은 밥을 하라고 하여 깨끗이 씻은 쌀을 솥에다 넣고는 물도 붓지 않은 상태에서 콩깍지로 아궁이 불을 계속 지폈다. 그러자 이내 밥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놀란 어른 스님들이 달려와 뚜껑을 열어보니 솥 밑바닥은 빨갛게 달구어져 있고 쌀은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뒤였다. 예전에는 쌀에 돌이 많이 섞여 있어서 어린아이 달래듯이 조리로 살살 쌀을 일어 돌을 골라내야 했다. 이런 것을 알 리 없던 스님은 어른스님께서 쌀을 씻어 일라고 하면 그저 조리를 휘휘 저어 팍팍 퍼냈다. 그래서 스님이 씻은 쌀로 밥을 지으면 돌이 씹혀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행자 시절은 참으로 고되고 힘이 들었지만 한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옛날 스님들은 일을 무섭게 시켰기 때문에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잘 때가 많았다. 스님은 옛날을 돌이켜보며, 요즘 사람들에 비해 고생은 무척 많이 했지만 그것 자체가 공부와 수행이 되었고 기도를 해도 지금보다 신심도 더 났던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스님은 1948년 13세 되던 해에 전주 정혜사에서 보광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전주 정혜사 강원을 졸업했다. 이듬해에 정혜사에서 묵담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차 도량불사 흥천사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을 위해 포교를 시작한 하라모쿠쇼가 1924년에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로써 1931년 10월 지금의 입구에 본당을 신축하였다. 안국이라는 의미는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의 편안을 의미한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소유권이 군산시청으로 넘어가 국군장병 및 전몰군경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로 활용되다가 1958년에 지환스님이 군산시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아 흥천사로 개칭했다. 당시 명예 주지는 부월스님이었고, 스님은 흥천사 총무에 취임했다. 그리하여 1964년에 정부로부터 토지를 불하받고 본격적인 도량 불사에 들어갔다. 그해에 대웅전과 요사채, 칠성각을 전면 보수했으며, 지장보살, 나반존자, 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 탱화를 모셨다. 1977년 당시 익산 원광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박순호 교수의 도움을 받아 폐사에 있던 석가탑을 모셨고, 1978년에는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모셨다.

수행 이렇듯 바쁜 불사 와중에서도 스님은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9년 내원사에서 하안거를 성만하고, 1980년에는 가사 불사와 대웅전 증축 불사를 했다. 1981년에는 기존의 칠성각을 허물고 그 자리에 30평의 반야선원(般若禪院)을 지어 그해 동안거 결재를 주도했다. 반야선원에서 안거를 나신 어느 스님에 따르면, 지환스님은 안거 중인 큰방 스님들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 해주었고, 후원의 보살님들 또한 정성을 다해 공양을 지어 해제 때가 되면 스님들이 모두 살이 쪄서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지환스님은 선방 스님들을 보면 절로 신심이 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1981년 세등선원에서 하안거를 나고, 1983년 윤필암에서 하안거, 1985년에는 삼선암에서 하안거를 성만했다.

반야유치원 운영

한편으로 스님은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년 정도의 공사 끝에 1987년 3월 6일 반야유치원을 신축하고 원장에 취임했다. 2004년 현재 창립 18년째 되는 반야유치원은 군산에서 제일 인기 있는 유치원으로 입학 때가 되면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다.

2차 도량불사 1987년에는 대한불교 보문종 종회의장을 맡았고, 1992년 4월 15일에는 그동안 살던 요사채와 법당이 더 이상은 보수하기 어려울 정도로 낡아서 흥천사 증축 불사라는 큰 원력을 세우고 기공식을 가졌다. 대웅전, 요사채와 함께 1981년부터 1990년까지 결재를 해오던 선원을 모두 헐어 3층짜리 건물로 불사를 하고, 일주문과 화장실 및 담장 공사까지 마무리하여 1994년 4월 29일에 낙성식을 했다. 새롭게 지어진 3층 건물의 1층은 140평으로 식당과 후원, 시민선방과 보살님들의 방으로 사용하고, 2층은 120평으로 스님들의 요사채와 사무실 용도로 쓰고 있으며, 3층의 100평은 법당인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신심 제일의 공부도량, 기도도량, 포교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대지가 좁아서 무허가 건물이라 반야선원을 10년 만에 폐쇄했던 일은 스님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아동청소년 양육 그 후에도 스님은 1994년 금련선원에서 하안거를 나고, 윤필암에서 동안거를 성만했다. 다음해에는 수덕사 견성암에서 하안거를, 금련선원에서 동안거를 성만했는데, 이때 스님의 세수 60세였다. 스님은 지금까지 50명 정도의 아이들을 키워왔는데, 늘 무욕의 자세로 어린이는 어른이 돌봐 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으로 돌봐왔다. 또한 아이들을 한 사람의 인격자로 키워 사회에 배출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부모보다 더 극진한 정성과 사랑을 쏟아 ‘아이들을 키우는 데 1등’ 스님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지금까지 스님이 키운 아이들 중에 7명이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제는 스님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공부하는 승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면 스님의 마음은 한없이 든든해진다고 한다.

다양한 포교활동 2004년 현재 세수 79세인 스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포교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족법회, 어린이법회, 청년회법회, 중고등부 학생법회, 시민선방, 양로원, 교도소 방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특히 지난 2009년부터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에 대한 탐구와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자 군산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백일장대회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