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비구니총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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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30일 (토) 11:28 판 (새 문서: * '''명칭 : 동화사 비구니총림''' * 소재지 : 대구 동구 도학동 35 (대구 동구 동화사1길 1) 동화사 1954년 8월 선학원에서 전국 비구승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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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칭 : 동화사 비구니총림
  • 소재지 : 대구 동구 도학동 35 (대구 동구 동화사1길 1) 동화사

1954년 8월 선학원에서 전국 비구승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봉암사결사에 참여하고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에 큰 역할 담당한 보문스님(普門, 1906~1956)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대책위원 15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보문이 가지 않은 이유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고, 정화의 방법과 원칙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문은 수행을 통한, 수행을 위한 불교의 정화와 개혁만을 생각했다.
보현사는 대구의 중심에 있어 이 지역 불교 정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수행력이 높고 인격이 청정한 스님이 그곳에 머물면서 불교 정화를 완성해야 한다고 비구승들이 뜻을 모았다. 보문은 경북도 종무원 종무원장이였던 한송(漢松)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아픈 몸을 이끌고 보현사로 내려왔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향곡(香谷)·성철(性徹)·청담(靑潭)·보문(普門)·자운(慈雲) 등과 함께 봉암사결사에 참여하고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에 큰 역할 담당한 보문스님은 대구 보현사에서의 불교정화운동으로 개혁실행을 바탕으로 하여 영남불교의 중심 본사인 동화사를 총림으로 만듦으로써 한국불교를 마지막으로 개혁하려했다. 그러나 동화사는 정책적 배려 차원에서 비구니 도량으로 결정됐다.
1954년 비구와 비구니의 서명으로 치안국에 제출된 ‘불교정화 대책안’에 의하면, 대구 동화사에 비구니총림의 설립을 계획함과 아울러 비구니 종회의원수는 비구의 1/6로 할당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게다가 오히려 당시에는 교구 본말사주지에 지금과 같은 비구·비구니 차별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구본사인 동화사의 주지로 비구니였던 성문스님이 취임(1955년)하기도하였다. 그리고 비구니 전문강원이 1956년 총무원의 승인 하에 처음으로 동학사에 설립되었고, 더불어 많은 비구니선원들이 앞다투어 개설되기도 했다. 이로써 비구니의 위상은 교육과 수행에 있어서도 종단내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교단 정화에 있어서도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교육적인 면에 있어서도 종단내의 비구니 위상이 현격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비구니를 위한 실질적인 종법상의 법개정 노력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1962년 통합종단의 종헌종법에서 비구니 스님은 과거보다 더 심하게 역할을 제한 받았으며, 고작해야 종회의원으로 인홍스님·법일스님·수옥스님 등 겨우 세 분만이 임명되었을 따름이다.
결국 당시에는 비구니사찰이 아닌 비구사찰로서 총림이 되는 것도 비구니 사찰이 되는 것도 무산되었다.

[출처]
- 전국비구니회지 제29호,제30호 합본호(불기2556년)
- 옛책의 香氣 [書卷氣 文字香] 이강옥 교수의 한국선 이야기. 보문(普門)의 구도 수행(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