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달스님(慧達, 1963生, 비구니)
혜달(慧達)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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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혜달(慧達) |
법호 | 지혜(智惠) |
속명 | 정진희(鄭眞熙) |
출생 | 1963년 |
출가 | 1982년 |
입적 | |
사찰 | 흥룡사(興龍寺) 광주광역시 남구 옹정3길 29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달스님은 법정사 항일운동 연구의 왜곡을 바로잡고 비구니 봉려관스님의 생애와 업적 및 근대 제주불교사의 정사正史를 드러내기 위하여 연구에 매진하는 대한민국의 비구니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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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남 광주시 계림3동에서 출생. 부친 정달조, 모친 박정례의 2녀. | |
1982년 전남 광주시 서석동 404번지 흥룡사에서 법희法稀스님을 은사로 출가수계 | |
1982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
1987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
1988년 봉녕사 비구니 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 |
1994년 국립대만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 |
1997년 국립대만사범대학 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 |
1999년 일본 리쯔메이칸 대학 교환연구생 | |
2000년 일본 하나조노대학 연구원 | |
2002년 국립대만사범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 |
2006년 동국대학교(서울) 선학과 강사 | |
2012년 두옥문도회 재무 | |
2017년 봉려관스님 생애 연구에 임하다 | |
2018년 사단법인 봉려관 선양회 이사 취임 | |
2018년 BBS 제주불교방송 운영위원 취임 | |
2019년 ‘제주의 여성 리더 봉려관, 항일의 꽃을 피우다’ 국제 심포지엄 개최 | |
2019년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창립 및 원장취임 | |
2020년 어른이 읽는 동화 ‘고마워요 봉려관’ 출간 | |
2021년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1’ 학술세미나 개최 | |
2022년 법보신문 ‘세심청정’ 필진으로 1년간 참여 | |
2022년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2’ 학술세미나 개최 | |
2022년 ‘고마워요 봉려관’ 다큐 제작 및 방영(BTN) | |
2023년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3’ 학술세미나 개최 | |
2024년 제주자치도 제작 법정사항일운동 드라마 다큐 ‘불씨’ 학술분야 자문위원 |
문중 | 두옥문중(斗玉) |
수행지침 | 大智若愚, 自選少慾生, 늘 주변을 살펴보고 돕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구여야 한다. |
수계제자 |
활동 및 공헌
은사 법희스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부처님이 좋아서 흥룡사를 찾았고, 흥룡사에서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것은 행운이었다. 법희스님의 자비로움은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늘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 있었다. 출가 전, 어머님은 늘 무언가를 주변에 나누어 드렸고, 그것을 심부름 한 것은 혜달이었다. 그런데 출가해서 절에 들어오니 법희스님은 일층 더하신 분이었다. 1987년 음력 6월 7일 오후 외출한 법희스님은 건널목 교통사고로 인해 이번 생의 인연을 마무리하셨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혜달은 은사스님을 마음에 담아두고 매일 인사를 드린다. 법희스님의 생전 덕행으로 사람들은 희스님의 상좌라고 해서 혜달을 달리 봐 주었으니, 은사가 쌓은 복덕을 상좌인 혜달이 그대로 받은 셈이다.
대만 유학
송광사 보성스님의 권유로 봉녕사 승가대학에 입학하였고, 당시 학장이셨던 묘엄스님은 매우 엄격하시면서도 자비하신 분이셨고, 가끔 서울에서 온 팥빵을 혜달에게 뒤로 건네주신 적도 있었다. 은사스님이 입적하신 후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던 혜달을 불러서 대만 유학을 권하신 분도 묘엄스님이고, 묘엄스님의 권유로 인해 유학을 결심한다. 1989년 11월 대만으로 유학을 갈 때는 계율연구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이 조사선, 묵조선, 간화선으로 바뀌었다. 혜달의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신 분이 스승 묘엄스님이다. 행자시절부터 승가대학을 거쳐 그 후 13년의 유학 경비는 물론 지금 혜달의 연구 공간까지 마련해 준 이돈우 거사와 배상희 보살은 혜달을 넉넉하게 외호해 주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봉려관스님과 연계되다
1983년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나고 며칠 후, 노스님인 안광호스님이 흥룡사에 오셨고, 이때 혜달에게 봉려관스님을 이야기해 주었으며, 혜달이 봉려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 때다. 1989년 안광호노스님이 입적하시자, 처음은 49일 동안 보덕사에 있으면서 법인사숙님을 도와 드리려고 했으나 반년을 거주하게 된다. 이때 혜달에게 3일 동안 대량의 봉려관스님 이야기를 해 준 분이 법인스님이다. 더불어 혜달에게 모시적삼을 주며 봉려관스님 생애 정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분도 법인스님이다. 1989년 5월 법인스님은 봉려관스님의 기도처를 찾아보려고 법렬, 효덕, 혜달 등과 함께 한라산 백록담 아래까지 갔지만, 찾지 못하고 철쭉꽃 구경만 하고 내려왔고, 이때 제주 보현암에 들러 법선노스님을 뵙게 해 주었다. 그 후에도 간간히 법인스님을 뵐 때면 잃지 않고 재삼 봉려관스님 이야기를 이어간 분이 법인스님이다. 은사 법희스님은 1982년 혜달을 담양 우송사에 데리고 가서 ‘국스님’이 계신 곳이라고 알려주신다. 이때 국스님은 입적하신 후였고, 키가 작은 상좌스님이 우송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법명이 ◯국 스님인 줄 알았던 혜달은 봉려관스님 생애를 연구하면서야 국스님이 국성해스님인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혜달과 봉려관스님의 인연의 끈이 연계된다.
봉려관스님 생애 왜곡
2017년 12월 16일, ‘한라산 영산재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고, 이 세미나에서 한 연구자가 봉려관스님의 입적지를 아무런 근거제시 없이 느닷없이 산천단 소림사로 바꿔버리는 발표를 하였다. 이 세미나에 참석했던 혜달은 예전에 안광호노스님, 법인스님이 한 구술과 전혀 다른 것을 이상하게 여겼고, 더군다나 이날 참석했던 봉려관스님 후손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해하던 그 모습에 의심을 갖게 된다. 혜달은 당시 봉려관스님 후손들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이후 근대제주불교관련 논문과 한 선생님의 논문 모두를 수집해서 교차검증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봉려관스님의 생애는 물론 근대제주불교사에 대한 빈약한 논리 근거 그리고 아예 근거제시도 없이 결론을 도출한 연구결과가 다수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봉려관 연구에 발을 담그게 된다. 제주와 육지에서 1년 가깝게 자료 수집과 구술채록을 진행했고, 그 결과 법정사항일운동사는 물론 근대제주불교역사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왜곡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크로스 체크도 없이 2차인용까지 진행됨에 따라 왜곡된 역사가 정사正史 역할을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봉려관스님의 입적지 왜곡이 혜달이 근대제주불교사 연구에 임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다. 연구자의 견해 차이에서 발생한 서로 다른 주장은 매우 건강한 연구 환경이지만, 역사적 근거를 넘어선 개인의 창의적 사고에 기반 한 결과물은 위험하다. 근대제주불교계 발전과 관련이 없는 보천교 단신도인 모 인물을 중심으로 근대제주불교역사를 재편하려는 발상은 이제 제지되어야 한다.
봉려관스님이 한 것은 한 것이고, 안한 것은 안한 것이다.
근대기 언론매체 기사 및 제주 기행문 등에 의거하면, 비구니 봉려관은 근대제주불교의 주역이다. 근거 자료에 입각해 봉려관스님의 업적 일부를 세상에 드러내 놓았지만, 여전히 일각에서는 근거도 없는 왜곡된 역사를 재삼 인용하고는 “우리는 몰랐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작가가 모르고 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까지 공부해서 일을 합니까” “모 선생님 논문 보고 했다”는 등등 다양한 이유를 대가며 책임 전가를 하고 그리고 가볍게 생각한다. 지방정부의 보조금을 받아서 한 사업인데도 말이다. 심각하다. 최근 제주 모 불교단체가 지방정부 보조금을 받아 제주 모 대학 산하연구원에 사업 진행을 의뢰해서 도출된 제주불교관련 기록물 정리 사업에서도 법정사와 아예 관련성이 없는 사람을 법정사 또는 법정사 항일운동과 관련지어 기술하는 등, 왜곡된 역사물을 교차 검증 없이 재사용하는 일이 또 발생했다. 동일한 성격의 사례가 20년 가깝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비구니 봉려관의 생애 및 법정사 항일운동사 더 나아가 근대제주불교역사 왜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비구니 봉려관은 불교암흑기에 처했던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다. 근대기 도심포교를 위해 제주 상권 최중심지에 포교당을 건립해서 제주불교의 세력을 확장해 나간 비구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 유치원 설립을 추진하고, 당시 교육기관 부족으로 사회문제가 초래되자 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기여하였으며, 지역사회 행사 참여 및 기근구제 등에도 앞장선 분이고, 1911년 항일운동을 염두에 두고 법정사를 창건해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견인시킨 분이기도 한다. 봉려관을 빼고 제주불교협회를 말할 수 있겠는가? 봉려관을 빼고 한라산 관음사의 역사가 갖춰지겠는가? 봉려관을 빼고 근대제주불교역사를 말할 수 있는가? 봉려관을 빼고 법정사 역사가 정립되겠는가? 비구니 봉려관이 마련한 불교계 제주도내의 부동산은 몇 평인가? 부동산의 행방은? 혜달은 비구니 봉려관의 행적을 숨기고 왜곡시킬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봉려관스님이 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향후 근대제주에서 활동한 봉려관의 행적은 해외 연구자와 함께 지속적으로 찾아낼 계획이다. 더불어 일부 후손들 역시 봉려관의 업적을 부풀려서는 안 될 것이며, 봉려관스님을 이용해서 개인적 명성을 쌓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정확한 사실의 역사와 그 기록을 바라다
기존의 문헌 및 언론매체 자료 그리고 구술 자료 등을 우선 크로스 체크한 후, 이것에 근거해서 다음 사항을 기술한다. 1)한라산 관음사의 최초 창건연도는 1909년이다. 최초 창건자는 비구니 봉려관이며, 개산조 역시 봉려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천포구에 있었던 고려시대 사찰 관음사(훗날 봉려관이 사명을 고관사古觀寺라 개칭함)의 역사를 1909년 최초 창건된 한라산 관음사의 역사인양 기술하고는 봉려관스님을 한라산 관음사의 중창주인양 왜곡하고 있다. 2)한라산 관음사의 창건자는 봉려관이다. 1914년 일반인 신분으로 가솔을 데리고 제주에 들어온 안도월은 1909년 창건된 한라산 관음사의 창건주일 수가 없다. 3)1909년 한라산 관음사 창건 당시 증명법사는 해남 대흥사 청봉화상이다. 1921년에야 제주에 들어온 이회명이 어찌 창건 당시 증명법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4)1909년 최초 창건된 한라산 관음사의 초대주지는 봉려관이다. 1903년생 오이화가 어찌 초대주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5)비구니 봉려관의 은사는 비구니 유장이다. 비구 청봉은 수계사이다. 6)한라산 관음사, 법정사는 봉려관이 홀로 최초 창건한 사찰이며, 초대 주지도 봉려관이다. 7)1908년 봉려관스님에게 가사를 공양한 운대사는 봉려관스님이 당시 처음 조우한 분이다. 근거 없이 개인의 창의적인 사고와 상상으로 더는 운대사를 왜곡해선 안 된다. 8)비구니 봉려관의 입적지는 한라산 관음사이다. 화장한 장소도 마찬가지다. 9)법정사는 항일을 염두에 두고 봉려관이 창건한 사찰이며, 중창에는 백인화가 함께 했고, 제주 4.3으로 인해 또 다시 회진灰塵된다. 10)『정구용 복심 판결문』과 기타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 자료에 의거하면,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은 당시 법정사 주지였던 김연일스님과 강창규, 방동화 등 66인, 약 400명이 함께한 제주도민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1)법정사 항일인사 중 승려로 기술한 대다수는 재 검토돼야 한다. 항일운동 가담자의 종교를 언급할 시는 1918년 10월 7일 오전 11시 해산까지 명확한 근거제시 하에 언급해야 한다. 12)오이화스님은 제주4.3이전부터 성내포교당에 주석했다. 당시 성내포교당에서 오이화와 함께 거주했던 분이 여전히 생존한다. 제주4.3으로 관음사가 불타자 오이화스님이 산천단 소림사에 주석했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13)비구니 봉려관이 산천단에서 입적하지 않아도, 오이화가 4.3이후 산천단에 거주하지 않았어도, 산천단 소림사는 정부 보조금으로 복원할 가치가 충분한 사찰이다. 14)더는 비구니여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되며, 제주라는 지역적 한계로 인해 근거를 넘어선 창의적인 사고에 의한 역사 왜곡이 더는 진행돼선 안 되고, 육지 연구자들도 근대제주불교 연구에 힘을 기우려야 한다. 15)역사 왜곡은 범죄다.
논문 및 저서
新校 黑水城本 『劫外錄』, 中華佛學硏究 6期, 2002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1」, 『한국불교학』 47, 한국불교학회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2」, 『한국불교학』 49, 한국불교학회 「간화병통에서 본 간화수행법」, 『보조사상』 29집, 보조사상연구원 「묵조선과 간화선의 오문悟門에 대한 견해」, 『보조사상』 31집, 보조사상연구원 「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스님」, 탐라성보문화원, 2018 『제주의 여성리더 봉려관』, 봉려관불교문화연구소, 2019 「해월당 봉려관 스님」, 『전통사찰 제주시 제2호 관음사종합정비계획』, 2019 「항일지사 봉려관 죽음을 둘러싼 의혹」, 『인구절벽시대의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2019 한국지방자치학회 하계학술대회, 2019 『봉려관, 근대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다』, 조계종출판사, 2021 「봉려관과 근대 제주불교 지평의 확장」, 『한마음연구』 11집, 대행선연구원, 2023 「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불교문예연구』 22집, 불교문예연구소, 202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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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달(慧達)스님 | 본항목 | 혜달스님(慧達, 1963~) | 慧達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달스님(慧達,_196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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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달(慧達)스님 | 두옥문중(斗玉) | ~의 일원이다 | |
혜달(慧達)스님 | 법희스님|법희스님(法稀) | ~의 수계제자이다 | |
혜달(慧達)스님 | 광주 흥룡사 | ~에서 출가하다 | |
혜달(慧達)스님 | 자운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혜달(慧達)스님 | 자운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혜달(慧達)스님 | 국립대만사범대학 | ~에서 학위를 취득하다 | 박사 |
혜달(慧達)스님 | 일본 하나조노대학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연구원 |
혜달(慧達)스님 | 동국대 서울캠퍼스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선학과 강사 |
혜달(慧達)스님 |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 ~을(를) 설립하다 | |
혜달(慧達)스님 |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원장 |
혜달(慧達)스님 | 사단법인 봉려관선양회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이사 |
혜달(慧達)스님 | BBS제주불교방송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운영위원 |
혜달(慧達)스님 | 근대제주불교의 정사正史 찾기 | ~에 기여하다 | |
혜달(慧達)스님 | 법정사항일운동의 정사正史 연구 | ~에 기여하다 | |
혜달(慧達)스님 | 봉려관스님 생애와 업적 연구 | ~에 기여하다 | |
혜달(慧達)스님 | 봉려관스님의 항일운동 연구 | ~에 기여하다 |
지도
- 흥룡사(興龍寺) : 광주광역시 남구 옹정3길 2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