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우종수(一愚宗壽)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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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일우종수(一愚宗壽, 1918~1985)
  • 생애·업적

종수스님은 1918년 1월27일 경북 의성군 구천면 장국리에서 부친 달성 서씨 공삼, 모친 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노스님이 바랑을 메고 들어 왔다하니 숙세의 연이라 했다. 속명은 경진(敬鎭)이다.
17세 되던 해 1935년 대구 파계사로 출가하여 벽담(碧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불명은 ‘종수’이며 ‘일우’는 법호이다. 1940년 동화사 동명(東溟)스님 아래에서 강원(승가대학)의 이력을 마쳤다. 이후 종수스님은 대구 동화사 금당의 세존사리탑전에 백일기도를 올렸다. 하루 한 끼의 공양과 장좌불와의 대용맹심으로 기도했다. 기도하는 중에 밤중에 사리탑 꼭대기에서 흰색의 서기가 뿜어 나옴을 보고 대신심이 일어 게송을 읊었다. “해동의 천고에 밝은 달이 강남의 만리 하늘에 비치니 그 맑은 빛이 피차가 없으니 나 이제 제방의 선지를 꿰뚫고 말겠노라(海東千古月 江南萬里天 淸光無彼此 欲斷諸存禪).”
종수스님은 교학을 벗어나 참선수행을 작심하고 길을 떠났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스님을 친견한 스님은 약간의 견처가 있었으나 만공스님이 일러준 말씀에 크게 분발했다. 만공스님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단지 부처될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을 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但知作佛 莫愁佛不解語).” 스님은 이 말에 일생을 멍텅구리로 살지언정 말만 따지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서원했다.
이어 오대산 한암스님을 뵈었다. 한암스님은 “계로 인하여 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하여 혜가 나온다. 아는 것과 행함이 상응해야 출가수행자라 할 수 있다(因戒生定 因定發慧 解行相應 方名爲僧)”고 했다. 종수스님은 이 말을 깊이 새겨 가슴에 담았다.
1942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영명(永明)율사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전국의 선원에서 안거정진했다. 항상 묵언 하에 대중에 수순했다. 1947년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다. 1949년 자운스님이 통도사에 천화율원을 개원하자 이에 참여하여 율장을 탐구했다. 이로써 종수스님은 경학과 참선수행 그리고 율장에 깊은 안목을 두루 갖추었다.
그러나 스님은 언제나 그러했듯 당신의 수행정진력을 밖으로 드러내 과시하거나 이를 내세워 명리를 좇지 않았다. 1964년 파계사 주지에 취임했다. 이 때 종수스님은 당시 성전암에 주석하던 성철스님을 모시고 파계사에 선원을 차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주지직을 내놓았다. 1968년 해인총림에서 동안거를 지내고 1970년 파계사 주지에 재 취임했다. 1978년 스님이 60세 되던 해 신도와 권속들의 권청(勸請)으로 의성 고운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1983년에는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어느 날 문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고금의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 생각에 이 몸이 환신인줄 안다. 환(幻)인줄 알아 환을 여의면 당당히 본신이 드러남이라(古今大智人 念念知幻身 知幻便離幻 堂堂現本身).” 이어 스님은 “칠십 인간사가 한바탕 봄꿈이니 너희들은 이 이치를 잘 알아 앉고 눕는 행동거지에 뜻을 산과 같이 하라.(七十人間事 一場春夢間 汝曹參此理 坐臥志如山)”하고는 입적했다. 1985년 10월10일(음력)이었다. 세수는 67세요 법랍은 44년이다. 장례는 원로회의장으로 봉행했다.

※ 출처 : (불교신문(2017-08-14) (이진두의 고승전) <19> 일우당 종수대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