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예순스님(禮順, 1587生, 비구니)
예순(禮順)스님 | |
---|---|
[[파일:|240px]] | |
법명 | 예순(禮順) |
법호 | |
속명 | |
출생 | 1587년 (조선시대 비구니) |
출가 | |
입적 | 1657년 |
사찰 |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예순스님은 조선의 비구니로, 인목대비를 극진히 모신 청룡사 제5 중창주이다.
생애
경력
연도 | 내용 |
---|---|
1587 | (선조 20년) 출생/ 부 인조반정 1등 정사공신 김유(金瑬) |
1610 | 청룡사 도심스님을 은사로 출가 |
1617 | (광해군 9년) 인목대비 유폐 |
1623 | 인조 제16대 왕위 즉위, 인목대비 환궁 |
1624 | (인조 2년) 청룡사 중창 및 영창대군 위패를 모셔 천도재 지냄 |
1634 | 병자호란으로 청룡사 퇴락 |
1657 | (효종 8년) 세수 71세, 법랍 47세로 입적 |
활동 및 공헌
출가
예순스님은 1587년(선조 20년) 인조반정 1등 정사공신인 김유의 딸로 태어났다. 17세 때 연안이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지만, 21세에 남편과 사별하여 다시 친정에 오게 되었다.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24세에 출가하였다.
인목대비와의 인연
출가 전부터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남다른 인연을 이어나갔다. 인목대비가 정사로 고통받던 순간에도 스님은 그 곁을 유일하게 지켰다. 선조 39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대북파는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였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순스님은 목숨을 걸고 인목대비를 만나며 바깥 소식을 전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청룡사 불사
광해군의 폭정은 정변의 구실을 주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인목대비도 복호되어 서궁에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이후 인목대비는 예순스님에게 청룡사 불사를 명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청룡사 불사를 완성하였고, 강화도 교동도에서 죽은 영창대군의 위패를 청룡사로 모셔와 천도재를 지내주었다. 그러나 19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으로 청룡사는 퇴락하고 난이 끝난 후 다시 중수되었다.
입적
예순스님은 1657년(효종 8년) 세수 71세, 법랍 47세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2~43)
- 선조·인조실록
- 광해 일기
- 대동야승
- 청룡사지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예순(禮順)스님 | 본항목 | 예순스님(禮順, 1587-1657) | 禮順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예순스님(禮順,_1587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
예순(禮順)스님 | 도심스님 | ~의 제자이다 |
예순(禮順)스님 | 청룡사 | ~에서 출가하다 |
정안(淨岸)스님 | 청룡사 | ~을 정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