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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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봉 용하(慧峰 龍河, 1874~1956)스님 [불교신문(2009.07.07 21:05)] 61. 혜봉용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7280 1874년 3월23일(음력) 충주 방호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이규직(李奎職) 선생과 모친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종국(李鍾國). 본관은 경주. 전형적인 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소년시절부터 사서삼경 등 한학을 익혔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6세에 한양 친척집으로 올라와 17세(1891년)의 어린 나이로 관직에 나섰다. 12년간 종4품에 해당하는 궁내부주서(主書)로 근무했다. 하지만 강대국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의 현실을 본 스님은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고 출가의 뜻을 품었다. 1904년 상주 남장사에서 영봉(靈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제방 선원과 강원에서 정진했다. 두루 이력을 마친 혜봉스님은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됐을 만큼 수행력이 높았다. 이후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을 거쳐 선산 도리사 주지, 동화사 대구포교당 포교사, 의성 고운사 포교당 포교사, 서울 각황사 중앙포교사 등의 소임을 보았다. 선사(禪師)를 은사로 출가해 선교를 공부한 후 참선 수행하는 한편 포교사로서 전법 활동에 매진했다. 한때 금강산 순례에 나서기도 했지만, 1937년부터는 대부분 상주 남장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남장사 관음선원 조실로 20년 가까이 주석하던 스님은 1956년 5월26일(음력) 원적에 들었다. 세수 83세, 법납 52세. 원적에 드는 날 상좌 고봉스님이 달려왔다. “스님, 제가 왔습니다.” 혜봉스님이 눈을 떴다. “그래, 왔구나.” 고봉스님이 은사의 얼굴에 흐른 땀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고, 얼마 뒤 혜봉스님은 편안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장례는 3일장으로 모셨다. 고봉(古峯)·고암(古庵)·의암(義庵)·일봉(一峯)스님, 뇌허 김동화 박사가 제자이다. 상주 남장사와 북장사 사적기를 비롯해 용흥사 시왕전 중수기, 청룡사 극락전 창건기, 문수사 사자암 상량문 등 11편의 기(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