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명(鶴鳴)스님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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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학명계종(鶴鳴啓宗 : 1867~1929)
  • 생애·업적

백학명 스님은 1867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아버지 백락채 씨와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숙에서 유교를 공부했다. 스님은 1886년 20세에 부모가 돌아가시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가업을 두 동생에게 맡긴 후 유람길에 나섰다가 구암사에서 당대의 강백인 설두 스님의 강경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였다. 영광 불갑사 환송(幻松) 장로에게 출가를 허락받고 금화(金華) 스님에게 득도하였다.
1890년 구암사를 찾아 수학하고 설유(雪乳) 강백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지리산 벽송사, 송광사 등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이름있는 선지식을 찾아 두루 참방하기를 10여 년간 하였다. 스님은 경·율·론의 삼장을 널리 통달하였다. 교학에 몰두하던 어느 날, 스님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사해탈(生死解脫)에 있으며, 경전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해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1902년부터 스님은 본격적인 참선수행에 들어갔다. 십수년 정진 끝에 부처와 조사가 입명(立命)한 경지를 깨우치고 다음의 오도송을 읊었다.

전생에는 누가 이 나이며
내세에는 내가 누가 될 것인고
현재에 이 나인 줄 알면
돌이켜 나 밖에 나를 알지로다.
全生誰是我(전생수시아)
來世我爲誰(내세아위수)
現在是知我(현재시지아)
還迷是知我(환미시지아)


1914년 봄 42세 때 스님은 해외를 돌아보고 중국과 일본의 이름난 선승과 선문답을 가졌다. 일본 임제종의 관장 석종연(釋宗演) 선사와의 선문답이 유명하다. 학명 스님은 일구어(一句語)로 조사선의 큰 기봉을 일본 천하에 뒤흔들었다. 그때 종연 선사는 스님을 가리켜 조선의 고불의 출현이라고 말했다.
1915년 변산 내소사(來蘇寺)와 월명암(月明庵)의 주지가 되어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학명 스님은 1922년 3월 30일~4월 1일 양일에 걸쳐 안국동 선학원에서 열린 선학원 선우공제회 창립총회에 참가하는 등 선우공제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다. 1923년(癸亥) 고찰 내장사가 쇠락하자 당시 백양사 송만암 스님의 권유로 내장사 주지가 되었다.
학명 스님은 내장사에서 3년 동안 극락보전을 중건하고 선원을 신축하였으며 경내에 흩어져 있던 부도를 현 부도전으로 안치하였다. 그리고 산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이 80두락에 이르렀으며, 항상 제자들에게 반선반농을 가르치며 놀고 먹는 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자선자수(自禪自修)’와 자력자식(自力自食)의 독특한 실천론을 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호를 백농(白農)이라 했다. 또 인근의 동남동녀를 모아 조석예경을 가르쳐 교화에 힘썼다.
1925년 망월사에서 열린 ‘만일참선결사’의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1927년에는 각황사(조계사의 전신) 중앙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납자들을 제접했다.
내장사의 중흥에 힘을 기울이던 학명 스님은 1929년 3월 27일, 법제자 매곡(梅谷)을 불러 “나 오늘 갈 터이다.”라고 일렀다. 그리고 달마도 6장을 그린 다음 제자 운곡(雲谷)에게 《원각경(圓覺經)》 〈보안장〉을 외라 이르고 미소지으며 고요히 입적하였다. 세수 63세 법랍 43년이었다. 학명 스님의 사리탑과 비는 내장사에 세워져 있다. 스님의 법제자로 매곡(梅谷)·고벽(古碧)·대휴(大休)·무곡(無谷)·다천(茶泉) 등이 있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946~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