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田岡)스님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7월 25일 (화) 14:50 판 (새 문서: * ''' 법호·법명 : 전강영신(田岡永信 : 1898~1975) ''' * ''' 생애·업적 '''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부친 정해룡(鄭海龍)씨와 모친 황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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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전강영신(田岡永信 : 1898~1975)
  • 생애·업적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부친 정해룡(鄭海龍)씨와 모친 황계수(黃桂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 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 수도하였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누각에서 개오(開悟)하고 오도송을 남겼다.

어젯밤 달빛은 누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부처와 조사도 신명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로화추)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그 뒤 전강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岩)을 찾아갔으며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고,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혜월(慧月)을 부산 선암사(仙巖寺)로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다시 그해에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을 찾아가 문답하였으나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는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하여, 반 철 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길로 만공에게 나아가니 확철대오를 인가받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의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이 되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의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듭는 시늉을 하니 “선재선재(善哉善哉)라.” 하고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만공은 전법게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니 23세에 오도한 후 2년 만인 25세의 일이다. 33세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다.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깨달음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 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다가, 1963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 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영가(靈駕)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가? 할(喝), 구구는 번성팔십일(九九飜成八十一)이니라”는 열반게를 남기고 좌탈입적(坐脫入寂)하였다. 전강 스님은 화장한 뒤 사리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하니 세수 78세, 법랍 62년이었다.
전강스님은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를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일대기를 비롯한 700여 개의 육성법문 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정우(正愚)·정무(正無)·정대(正大)·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558~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