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도훈스님(道勳, 1933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7월 3일 (월) 16:34 판 (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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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도훈(道勳)스님은 영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많은 선방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청도 금용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3 경북 영일 출생
1958 범어사 대성암에서 영신(永信)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8~1963 대성암 안거 성만, 1961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4 내원사에서 2년간 안거 성만
1966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6~1978 양진암, 극락암, 견성암 등 선원 안거 성만
1979 청도 금용사 주지 취임
1997 범어사 대성암 하안거 성만
2004 금용사 회주
문중 보운(普雲)문중
수행지침 한 생각을 놓치지 말고 정진하라.
수계제자 효준(曉俊)·휴상(休相)·연호(蓮淏)·정완(珵莞)·운해(雲海)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40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41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42
[금용사 전경] 사진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도훈(道勳)스님은 1933년 음력 6월 14일 경북 영일군 지행면 대진리에서 아버지 오학수와 어머니 김득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이름은 오난영이다. 스님은 일찍이 불가와 인연이 각별했다. 당시 부산에 살던 외숙모 집에 가면 외숙모가 잘 알던 스님이 오시곤 하였다. 평소 그 스님은 “사회에서 살아보아야 별 것 아니다.” 라며 항상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어 발심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스님의 나이 26세인 1958년 10월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서 영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영신스님은 언제나 말씀이 없었으며, 참선만 하는 분이셨다.

출가할 당시 대성암에는만성 노스님께서 주지로 계셨다. 주지스님은 스님을 보고 “나이가 어리지도 않은데 선(禪)이나 하지!" 하면서 은근히 참선을 강조하셨다. 스님도 견성을 하셨다는 어른스님 밑에 있고 싶어서 범어사 대성암에서 안거를 보내게 되었다.

학업과 수행

그 뒤 스님은 1961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으며, 1966년 3월 15일에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만성스님의 가르침

대성암은 비구니 선원 중 전통 있는 암자로서 만성스님이 지도하고 계셨다. 비구니계의 큰스님인 만성스님은 포교도 불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깨달음을 위한 ‘자기 공부'라며 오로지 참선 수행만을 강조하셨다.

그 분의 가풍을 이어받은 스님 또한 절제하는 정신이 곧바로 생활로 이어져 늘 근검절약을 강조한다. 일꾼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불사에 임하면서도 '이 뭣고(是甚摩)'의 화두를 놓지 않는 수행의 모습은 곁에 있는 스님들에게 가르침이 된다.

어려운 절 살림

봄,가을에 전 대중이 탁발을 나가고 방부를 들일 때에는 쌀을 세 말씩 내거나 돈 3천 원으로 쌀값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봄에 탁발한 것으로 여름을 나고, 가을에 탁발한 것으로 겨울 안거를 나곤 하였다. 당시 쌀 세 말을 얻기 위해 탁발을 하러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저녁때에는 걸망을 진 어깨에 허물이 벗겨지는 것은 예사였다. 그런데 언제나 그날 첫 번째 들리는 집이 제일 힘들고 어려운 마음이 들곤 했다.

가을이면 정자나무 밑에서 쉬고 계시던 할아버지들이 “중 동냥 주지 마라. 만고 천년에 아들을 낳아 전쟁에 내보내지도 않고 맨날 앉아서 얻어만 먹는다.” 하며 탁발을 주지 말라고 비아냥거렸다. 어느 날은 당시 제일 빠른 열차인 재근호를 타고 서울까지 가서 탁발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시골에서의 탁발은 어려웠다.

스님은 대성암에서 7~8년 동안 안거를 났는데, 이때 스님을 중노릇 시키려고 대성암까지 데려 다주신 삼현스님(만성스님 시봉)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로 삼현스님 은 돌아가시고 스님은 허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이 일로 인간 세상의 무상을 절실히 느꼈다.

내원사에서 공양주로 살다

그 후 도훈스님은 1964년 양산 내원사에서 2년간 공양주[1]를 살았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귀한 시절이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가을에 홍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애를 먹기도 하였다.

스님은 대중들이 모두 함께 하는 울력[2]이 재미있었다. 젊은 마음에 대중과 같이 웃으며 일하고 사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고 한다. 하루는 천성산 화엄벌(원효대사가 판자 던진 곳. 현재는 비행장 임)에 행각차 다녀오기도 하며 신심을 키웠다.

내원사에서 다시 양진암으로 가서 동안거를 나는데 양식이 귀하여 밥은 동화사 양진암에서 먹고 내원암에서 동안거를 나기도 하였다. 당시 입승[3]스님은 혜암 노스님이셨다.

내원암에서는 사부대중이 모두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스님은 이때 장좌불와를 하며 뼈를 깎는 구도의 정진을 거듭하였다. 거듭되는 수행에 이따금 밀려드는 수마를 쫓기 위해 내원암 기둥을 안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수마와 싸웠지만 어찌나 잠이 밀려드는지 양진암 노스님이 주신 엿으로 잠을 쫓기도 하였다.

성철 큰스님을 친견하다

해인사 극락암에서 동안거를 결제할 때 성철 큰스님을 친견하러 갔었는데 큰스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산에서 밤을 새운 뒤 다음날 새벽에야 뵐 수 있었다. 가르침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추 위와 산속의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불필스님, 혜춘스님과 같이 여러 번 큰스님을 친견하러 가기도 하였다.

청도 금용사로 오다

이후 수덕사 견성암에서 동안거를 나고 47세 되던 해인 1979년 현재 스님이 거주하는 경북 청도의 금용사가 인연의 도량이 되었다. 스님은 금용사에서 염불과 울력을 공부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후 1997년에는 범어사 대성암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선방에 다닐 때면 항상 즐거웠다는 스님은 자신이 늙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요즘은 다른 노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깝다고 말한다. 도훈스님은 '한 생각도 놓치지 말고 정진하라.' 는 수행지침을 바탕으로 정진하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효준(曉俊)·휴상(休相)·연호(蓮淏)·정완(珵莞)·운해(雲海)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39~54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93.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51, 43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도훈(道勳)스님 본항목 도훈스님(道勳, 19~19) 道勳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도훈스님(道勳,_193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도훈(道勳)스님 보운문중(普雲) ~의 일원이다
도훈(道勳)스님 영신(永信)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도훈(道勳)스님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에서 출가하다
도훈(道勳)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도훈(道勳)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도훈(道勳)스님 안거 ~을(를) 성만하다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양산 내원사,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통도사 극락암, 예산 수덕사 견성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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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금용사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1020



주석

  1.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
  2.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하는 일
  3.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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